뮌헨(2005)

영화 내용 스포일러 포함

by 마법거북이


복수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복수극에는 끝이 있어야 한다.

끝이 없는 복수란 악행일 뿐이다.

이 악행은 무엇을 닮았는가.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장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 김기택 '사무원'중 일부.


스필버그의 기이한 복수극인 '뮌헨'은 전형적인 장르 영화처럼 시작하나, 사무적인 복수에는 쾌감이 없어 주인공 에브너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진 건 끝이 보이지 않는 복수의 반복과 이에 따른 피로감 뿐이다.


끝이 없는 복수에는 쾌감이 없고 쾌감 없는 복수극을 우리는 왜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들여다 보고 있어야 할까?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라는 교훈을 받기 위해?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장좌불립'이라고 불렀다 한다. - 김기택 '사무원'중 일부.


복수가 끝이 있어야만이 복수라고 할 수 있듯 고행도 끝이 있어야 한다. 사무원에게 고행은 분명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어느새 목적이자 자기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어있다.

사무원이 끊지 못한 고행 아닌 고통을, 에브너는 상관 에브레임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화면을 벗어남으로서 스스로 끊어냈다. 그가 화면을 빠져나가마자 영화는 끝이 나기에 그가 복수의 고리를 끊어냄으로서 얻은 것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생'밖에 없다. 그마저도 그가 복수의 대상을 찾아 전 유럽을 돌아다녔듯 그 역시 누군가의 복수의 대상이 되었을지 모르기에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복수가 복수이기 위해선 스스로 중지해야만 한다는 역설, 에브너는 어떠했나, 그는 증오의 대상과는 상관없는 사람을 휘말리게 만들고, 살해하고 기어이 동료를 모두 잃게 되기까지, 그는 최대한 생각을 거부했다. 하나 둘 동료들이 행위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할 때 그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맹목으로 팀을 이끌고자 했다. 일체의 판단을 중지한 그는 이 생각을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거리낌이 없어진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동료의 죽음, 자기도 복수의 대상이 될 지 모른다는 불안, 고생 끝에 돌아간 조국에선 간단한 인사치레가 전부이고, 상관은 도리어 자신을 추궁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근본적으론 변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떻게 상관과는 다른 방향으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이유는 스스로 중지해서가 아닌 가족에 대한 위협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그가 이전까지 보여준 모습과 상반되는 측면이 나타난다.

그는 정보가 계속 새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위협의 정체에 대해 왜 처음보는 정보원보다 자신의 조국과 상관을 더 의심했을까?

여기서도 눈에 띄는 지점은 '가족'으로 엮이는 인간 관계다. 에브너는 조국의 사람들과는 나누지 못했던 유대를 정보원 가족과 나눈다. 상관과의 대화는 주로 돈과 관련된다. 민족의 복수라면서도 그 복수는 정해진 예산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임무를 부여받을 때부터 상관이 단호하게 언급한 이 문제는 영화 내내 자주 언급되곤 한다. 어떤 것에도 방해 받는 일 따윈 없이 뜨겁게 이뤄지는 복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눈까지 가려가며 긴장 속에 처음으로 맞닥뜨린 정보원의 아버지이자 보스인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그저 그들 가족의 식사 자리를 함께 할 뿐이다.

하지만 단지 이 이유로 그는 가족을 미행하는 자를 발견했을 때, 프랑스인 정보원이 자기 이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이고 있었음에도 우리 쪽에선 너를 해치지 않는다는 한 마디를 스스럼없이 믿어 곧장 이스라엘 대사관에 찾아갈만한 타당한 이유가 될까?


그는 정사 속에 창문 너머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선수들을 본다. 그가 아이의 첫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곧바로 이스라엘 선수들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에서 이들이 움직이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는 오프닝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번은 모두 에브너가 가족을 만날 때 등장하는 것인데, 이를 단순하게 보면 그에게 있어 가족과 복수심이 대립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마지막 정사 장면 직후에 그는 상관과 결별을 선언하므로 그에게 계기가 된 건 역시나 가족인 것일까?


그는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 '사무원' 중에서


에브너는 사무적으로 복수를 처리했으나 그는 복수에 매달리는 걸 행운으로 여기지 았않다. 영화가 나아갈수록 그와 동료들은 자신도 복수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보다 눈에 띄는 정서는 영화를 지배하는 짙은 피로감이다.

에브너도, 동료들도 점점 지쳐간다. 동료들은 하나 둘 조용히 처리되듯 고요한 죽음을 맞는다. 세 번째 동료가 죽었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정보원을 만난다. 이때 그전까지 또렷하지 않았던 집에 두 가지 의미가 생긴다. 쇼윈도 너머로 이상화된 가정집의 인테리어를 바라보며 정보원은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이런 집을 갖게 되겠지, 돈은 많이 들겠지만 집은 꾸밀 가치가 있다고.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 '사무원' 중에서


땅, 고향을 뜻하는 집과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두 개의 집이 분리되는 순간, 그의 복수는 이제 더는 복수심에 따른 행위가 아니다. 국가의 복수가 비용 안에서 처리되어야 하듯 복수자의 그것도 생활인의 행위로 떨어진다.

우리가 찾아야 해, 아무도 손에 쥐어주지 않으니까, 에브너의 어머니는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지 고백하고자 하는 아들을 거부하고, 에브너는 여느 첩보요원과 마찬가지로 타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에브너가 가장 솔직한 대화를 나눴던 건 우연히 맞닥뜨린 팔레스타인 측 요원이었다. 너무 드라마틱한 상황이긴 하나 이들 대화의 핵심은 간결하다. 팔레스타인 요원은 말한다, 너희는 집이 없는 심정을 모른다고. 비록 그는 에브너를 독일인인 줄 알고 한 말이지만 그의 말은 마치 예언과도 같이 작용해, 에브너는 점점 집을 잃어간다. 상관도, 그의 가족도 집이 없지 않다. 집이 있는 디아스포라들 속에서 에브너는 집이 없는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속의 디아스포라가 되어간다.


가족이 우선이라던 수장은 그가 훈장을 받을 때조차 나타나지 않고, 그에게 커피를 권하며 임무를 제안하던 첫 시작과 달리 라스트 씬의 상관 에브레임은 그의 식사 제안을 거절하며 그전에 에브너가 건네주던 음식도 거절한다, 그 음식이란 처음에는 자신이 먼저 에브너에게 건네던 음식이었음에도.

그때는 에브너가 음식을 거절했다, 왜 현장 요원도 아닌 자신에게 임무를 맡기는 지 어리둥절해하는 에브너는 딱히 설득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에브레임 역시 구체적인 근거로 그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사무원' 중에서


사무원은 이제 자기 정체성을 내맡기다 못해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 에브너가 깨달은 시점은 언제인가, 자신은 복수심이든, 땅으로서의 집이든 어느 것과도 합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머니와의 대화, 상관과의 대화, 동료와의 대화, 정보원과의 대화, 어쩌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야 해, 아무도 손에 쥐어주지 않으니까, 에브너의 어머니는 말한다. 정체성을 두고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서는 디아스포라에게 이 말은 당연하다.

그가 왜 자기의 역할을 받아들였는지 명확히 알 수 없듯 그가 왜 그 역할을 다시 스스로 내려놓았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복수를 결심했을 땐 복수를 위한 논리를 스스로 마련하고, 포기를 결심했을 땐 다시 거기에 대한 논리를 스스로 마련할 따름이다.


마지막 임무 현장에서 위기에 몰린 에브너는 복수의 대상이 아닌 한 소년 경호원을 쏘아 죽인다. 이스라엘 선수들이 죽어가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 목표는 그들을 인질로 삼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는 것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단원 역시 에브너에게 죽은 소년처럼 머리가 터져 죽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헬기에 타있던 선수들은 다른 단원에게 몰살을 당한다.

수단이 목적을 넘어설 때, 어떤 일에 대한 복수(複數)의 당위가 서로 부닥치며 모순을 빚는다.

영화는 그것을 한 사람이 둘 다 취하는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단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고.


정신의학에선 '고행'을 고난을 이겨낸 기쁨을 통해 죄의식 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본다고 한다.

시작은 수단이었을지라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수단 역시 끊어내야 한다.

끊지 못한다면 영원히 반복되는 고행을 닮은 고통을 끊어낼 때, 그제야 비로소 고통은 고통을 닮은 고행이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 한 번만 나올 수 있는 복수극이다. 어떤 복수극도 이와 같은 복수극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 그건 애초에 복수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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