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2013)

영화 내용 스포일러 포함

by 마법거북이

기차는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나뉘어진 꼬리와 머리에서 꼬리칸 사람들 역시 머리를 향해 나아간다. 어찌보면 이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무척이나 명쾌하게, 그리고 호쾌하게 꼬리칸 사람들이 차별에 맞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들의 입장을 따라간다면 머리에는 거악이 있어야 마땅하다. 꼬리칸과 머리를 구분하며 차별의 구조를 만들어낸 자가 있어 그를 제거하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

머리에는 분명 그런 자가 있었다, 열차의 창조자인 동시에 그곳을 지배하며 군림하는 자가. 그러나 그는 열차의 창조자이긴 해도 구조를 만들어낸 자는 아니었다. 이제 남은 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꼬리칸의 수장 길리엄은 아마도 젊은 시절 다른 선택을 했던 듯 싶다. 체제를 부수려 했다간 기차라는 안전한 집 자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포기이자 공존을 택했고, 기차가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품인 아이를 꼬리칸에서 때마다 머리칸에 공급했다.


약자의 희생 없이 자립할 수 없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부수기 위해서는 기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기차 밖에는 혹독한 자연이 있다. 말하자면 이미 종말이 온 지구에서 스스로 한 번 더 종말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커티스는 과거의 길리엄과, 또한 과거의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이렇게 맞게 되는 결말이 결코 끝도 아닐 뿐더러 해피 엔딩 역시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기차를 벗어나 살 수 있다는 증명인 동시에 기차 밖에서의 삶이 얼마나 험난할 것인지에 대한 표지와도 같은 곰 한 마리. 아이를 희생시킬 수 없어 기차 안의 모두를 버리고 얻은 것이 곰에 불과한 결말을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차는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우리가 타는 기차에는 각자의 종착역이 있고, 기차의 종착은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각자의 종착역에 모두 내려주는 것이다.

종말이 찾아온 지구의 기차란 곧 집이기에 설국열차에는 종착지가 없다. 그저 둥근 지구를 끝없이 순환할 뿐이다.

끝없는 순환 속에 기차 안의 이야기도 끝없이 반복된다. 길리엄과 윌포드, 두 수장은 기차의 임계점을 넘지 않는 적절한 인구를 위해 차별의 구조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갈등을 이용해 반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커티스의 저항 이전에는 맥그리거가, 그보다 전에는 7인의 반란이 있었다고 윌포드는 언급한다.


이 반복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아이와 함께 탈주에 성공하는 건 커티스가 아닌 기차의 부품 역할을 했던 아이와 요나다.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자답게, 요나는 첫 등장부터가 관같은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기차 뱃속에 집어삼켜진 자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요나는 밖으로 나가 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끊음으로서 끝맺어야 한다.

하지만 요나에게 요나란 이름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를 희생해서라도 한 명의 희생이 있어선 안 된다는 과감한 윤리적 결단의 결정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가 꼬리칸 사람들의 정서를 손쉽게 따라갈 수 있는 데에는 단순히 차별에 따른 분노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영화는 그 근거를 기억으로 마련한다.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없는 앞칸의 사람들은 욕구에 매몰된다. 힘에 대한 굴종, 마약, 클럽, 미식 등 이들이 한 칸씩 나아갈 때마다 그려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본 뜬 풍경에는 기억이 없다. 반면 꼬리칸의 화가는 그림으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초상화를 남긴다.


이들의 기억은 퇴폐와 싸운다. 서로의 관계를 기억하고 공유하며 퇴폐와 싸우는 기억이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타인을 위해 과감히 자기 팔을 자른 윌리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커티스의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선 그는 과거의 자신, 과거의 윌리엄과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가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면 모든 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순환하게 되고, 그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 없는 거짓이 된다.

이러한 고리를 끊기 위해선 기차 밖으로 나감으로서 종착지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이야기는 그 자신에게 진실로서 자리할 수 있으며 그래야 이들은 인간으로 존재할 자리를 얻게 된다. 즉, 나만의 이야기를 지키는 일이 차별의 구조를 깨부수는 일 이전에 이들이 근본적으로 해야할 일인 것이다. 그럼으로서 얻게 되는 이야기가 고작 곰 한 마리에 불과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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