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 스포일러 포함
마음이란 때로 묘한 것이어서 자기도 어쩔 줄 몰라 헤맬 때가 있다. 마치 혼자만의 죄의식으로 마음이 가득 차 그 내밀한 속사정을 풀지 못해 괴로워하는 소세키의 ‘마음’속 주인공처럼.
무엇인가를 극도로 추구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결핍을 얻는다. 결핍을 가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인지, 무엇인가를 추구하다 결핍을 얻은 것인지 모를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건 외로워진다. 영화는 마크 슐츠가 단상에 선 채 초등학생들에게 차에서 내리기 전 미리 목에 걸었던 메달을 들어 보이는, 우습다가도 안쓰럽기 그지없는 장면 하나만으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 안쓰럽다 못해 지독하기 그지없는 장면은 그대로 이 장면이 품고 있는 정서로 이어지고, 이러한 영화의 정서는 인물의 결핍으로, 인물의 결핍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또 다른 마음으로 이어져 존 듀폰의 결핍과 이어지고, 존 듀폰의 결핍은 살인으로 이어지지만 영화는 살인의 이유나 원인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어찌 보면 영화는 이미 모든 걸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음을 잃은 자의 마음의 풍경에 영화는 질리도록 집중하지만 서걱대는 듀폰 가문 농장의 자연 풍경만큼이나 텅 빈 공허함, 그것이 마음의 전부인데 달리 무엇을 더 보여주겠나.
이들이 마음을 잃게 된 원인을 인정 투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어머니의 인정 혹은 어머니의 애정에 대한 갈구, 자신과 똑같이 레슬링을 하는 형과의 격차로 인한 동생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투쟁. 또한 이 세 사람의 관계 속에 깊게 끼어 있는 돈과 계층이라는 요소로 원인을 따져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시작과 끝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마치 자본과 미국에 대한 강렬한 비판처럼 보인다. 금메달리스트이지만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의 대가로 20달러를 받고 돌아와 패스트푸드를 먹고 집에 돌아와서도 인스턴트 식품으로 식사를 때우는 마크 슐츠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폭스캐처를 떠난 후로 레슬링마저 그만두고 돈이 되는 격투기에 참가한 마크 슐츠와 그의 얼굴 뒤로 사람들이 외치는 USA라는 환호성으로 끝이 난다.
영화의 중간, 동료들과 함께 TV를 보던 마크는 레슬러를 그만둔 뒤 격투기 쇼 비즈니스를 하고있는 동료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마침내 마크가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마크와 존 듀폰은 이 장면 이후에 벌어지는 일로 인해 한순간에 모든 관계가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니 마크가 레슬러를 그만두고 USA를 연호하는 외침 속에 서게 된 건 자본주의에 굴복한 게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존 듀폰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노력했던 마크 슐츠가 모욕을 당한 후로 그동안의 노력을 포기했기에 서게 된 자리이다.
그러나 존 듀폰은 계급 의식으로 인해 마크 슐츠를 내쳤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 역시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향해 팽창하고 부딪히다 깨져버린 결과이다.
이들이 결핍에 찬 인물이기 때문에, 결핍에 차 무언가를 추구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려 그들의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 보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에 대한 어느 평론가의 평처럼 결핍이 팽창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어느새 결핍이 곧 마음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소우주라더니 마음은 우주처럼 팽창한다. 마음은 딱히 이유가 있어 팽창하지도, 이유의 결과로 팽창하지도 않는다. 마음이란 때로 무척 이기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커지고 줄어든다. 이들의 관계도 그렇다. 어쩌면 이들은 나름대로 잘 지내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데이브는 그의 바람대로 폭스캐처 농장에서 잘해보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 결과란 피할 수 없는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전까지의 영화의 모든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도 보여진다.
존 듀폰이 자신의 트로피를 로즈몬트 장식장에 올리길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한 후 왜 마크 슐츠에게 데이브 슐츠를 데려오길 닦달했을까. 그는 사실 처음부터 더 뛰어난 데이브 슐츠를 데려오길 원했던 걸까? 아니면 마크 슐츠와 함께 간 대회에서 그가 마크와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영화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풍기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행동에 개연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나 싸이코패스로 몰아 존 듀폰이라고 하는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는 결론이 마음속에서 도출되지도 않는다.
존 듀폰이라는 인물은 마크 슐츠만큼이나 우습고 우습다 못해 안쓰럽지만 마크 슐츠에게는 없는 어딘가 조마조마한 데가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른다, 영화의 기반이 되는 실화를 모르고 봐도 그렇다. 이렇듯 그를 이상한 사람, 어딘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들면서도 어머니 앞에서 코치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레슬링 자세를 선수들 앞에서 시범으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보통의 인간,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한 유년 시절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그는 큰 돈을 들여 무기를 수집하다가 장갑차 위에 총이 달려 있지 않다고 짜증을 내는 모습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몸만 큰 성인같이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만을 집어내 그를 어떤 전형성을 가진 인물로 보고 그의 행위를 설명하기엔 연설에 앞서 헬기에서 마크에게 어휘를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보듯 그는 분명 교육을 많이 받은, 그것도 상류층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데 그의 마음에 공감하는 일이 무리가 없는 모순. 아무리 콤플렉스가 본래 공감하기 쉬운 감정일지라도 그의 상황을 보편의 문제로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는 설득력을 이 영화는 갖고있는 것이다. 이토록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인간에게 공감하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이 영화의 핍진성이 잘 이루어져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마음 깊숙이 설득되긴 어려운 이유.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과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상을 추구하던 자가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자기 파괴를 일삼던 사람이 한순간에 돌연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새 삶을 사는 경우를 창작물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장 일본의 적군파들이 일으킨 숙청 사건만 하더라도 어떤가, 시작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청년들일 뿐이었다.
종이 한 장의 차이, 혹은 처음부터 구분 지을 수 없는 똑같은 행위의 서로 다른 방향. 존 듀폰이 자주 언급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상, 마크 슐츠가 흥분된 모습으로 자신도 똑같이 동의한다고 말한 현 시대의 문제점 같은 것들은 단지 말뿐이 아닌 둘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에게 공허하게 들리는 만큼 어쩌면 그건 그들 자신에게조차 공허한 진심이었을지도 모르며 진심은 진심이되 서로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스스로에게 주술 걸듯 주문한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셋 모두 그들 마음의 일부로써 그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마음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음은 자기 마음 이외의 다른 마음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은 팽창한다. 목적을 향해, 대상을 향해, 무언가를 향해.
당연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흔하게 통하는 말이 있다. 의지를 다지기 좋은 말이지만 때로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특히나 위와 같은 마음의 특성을 염두에 둔 채 이 말을 곱씹어보면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고 스스로를 달래봐도 파고드는 무력감, 공허한 진심.
마음은 달려간다, 파멸이 됐든 이상이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무언가를 향해.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만큼 움직이고 또, 그리고 다시 생각하고 생각만큼만 움직이는 존재다.
마음은 좀체 가만히 있지 못한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잘못을 범한다는 괴테의 말을 증명하듯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마음. 그렇기에 존 듀폰의 마음이 달려가 맞이한 자리는 마음의 최종 종착지이기도 하고 곧 마음의 일부이기도 하다. 파국을 향해 치달은 영화의 끝, 카타르시스를 얻기는 커녕 업을 쌓는 그곳에서 존 듀폰의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을 기다릴 것이다, 자기와 꼭 같은 마음을. 마음의 일부이면서도 그것은 마치 마음의 밖에 있는 것처럼, 바이러스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속에 들어와 달려가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핍진(乏盡)은 곧 핍진(逼眞)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