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용 스포일러 포함
버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죄를 저질렀다.
마조리 부인은 상대적인 죄를 마을 사람들에게 행했다. 사실 마조리 부인에게 명백하게 죄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마을 사람들에게 언제나 못되게 굴었다는 증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마조리 부인은 분명 버니와 달리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이 문제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은 증언을 한다. 마조리 부인은 못됐고, 버니는 착하다는 것이다.
호혜성은 윤리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 그건 철학에서 윤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점하냐를 묻는 것만큼이나 모호한 문제일 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명 많은 부분 상호주의를 통해 돌아간다. 우리는 대개 타인에게 내가 준 만큼은 돌려받길 원하곤 한다.
마조리 부인에겐 돌아오는 것이 없다. 그녀는 그저 인색하고, 인색하다 못해 때로는 이웃들이 탐욕스럽다고 받아들일 정도로 배타적이다.
물론 그녀가 꼭 마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부가 선택의 행위이듯 고운 말 한 마디, 사려깊은 배려도 어쩌면 선택에 불과할 지 모른다.
반면, 버니는 베풀 줄 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이해 없이 선물을 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그런다고 버니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견해를 대변하는 검사 대니의 눈에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친 것처럼 보인다. 도무지 사회의 윤리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두고 검사 대니는 재판에서 질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검사 대니는 영화가 그 전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문제를 스치듯이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며 버니를 걸고 넘어진다. 버니가 마조리 부인과 함께 즐겼던 문화 생활, 그리고 그런 문화를 향유하는 데 필요한 돈. 마조리 부인과 버니의 관계에서 당연하다 싶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문제임에도 영화는 그 전까지 버니가 얼마나 주변에 베푸는 지에 대해서만 다큐멘터리적인 인터뷰 형식으로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언급했다.
검사 대니의 지적은 타인에 대한 호혜성의 유무로 나뉘는 버니와 마조리 부인의 차이, 여기서 비롯되는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를 오롯이 버니의 문제로 돌려버린다. 더 이상 선인이 아닌 버니는 그저 남의 돈으로 호의호식을 즐긴 자이므로 버니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형식상의 특징 때문에 크게 질문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딱히 어떤 의도를 가진 경향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버니라는 한 인물을 인터뷰로 구성해나가며 영화의 중반부에 벌어지게 될 사건을 보여주고, 이어 그 사건을 둘러싼 주변의 반응과 재판, 그리고 재판 결과가 영화의 끝이기 때문에 일견 매우 싱거운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재판의 결과가 매우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을 사람들이 버니에 대한 인터뷰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지나면 나오는, 영화의 배경인 텍사스 카시지에 대한 언급이다. 사람들은 카시지를 살기 좋은 곳이라 말한다. 그러나 타지 사람인 버니가 이곳에 온 이유인 증가하는 노인 인구가 말해주듯 한편으로 카시지는 쇠락해가는 곳이다. 남부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버니를 흔히 말하는 남부적 전통을 잇는 사람으로, 마조리 부인을 그런 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사람으로 본다면, 그리고 이 둘을 서로 다른 가치의 대립으로 본 마을 사람들과 달리 검사 대니가 버니 개인의 문제로 돌린 핵심이 계급이라면 과도한 해석이 될까?
검사 대니는 재판 장소를 카시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바꾼다. 한 마을 사람에 의하면 그곳은 못 배운 노동자가 많은 곳이라 한다. 즉, 버니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배심원들은 마조리 부인보다는 버니와 조금 더 가까울 그들, 버니가 이웃에게 전해준 따뜻한 경제적 호혜와 관련이 없는 그들에겐 아마도 버니의 문제가 마을 사람들처럼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호혜성에는 상호주의적인 호혜도 있지만 그보다 폭넓게 내가 돌려받을 이익을 따지지 않고 전하는 호혜성도 있다고 한다. 법에 어긋나진 않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윤리적인 사람일까? 선인이 법에 어긋나는 죄를 저질렀을 때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전자의 질문은 과연 후자만큼 어떤 모호함도 없는 질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