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진 티셔츠와 헤질 대로 헤진 바지를 집어 벗어던지고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섰다. 낯선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운 겨울 동안 집에서만 있었기에 스킨, 로션만 겨우 바르고 살았다. 가끔씩은 하루 종일 세수조차 안 하기도. 방심했던 탓에 얼굴엔 기미도, 잡티도. 우울감이 밀려오는 순간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유통기한이 지났을지도 모를 화장품을 꺼내어 내 마음의 우울함까지 덕지덕지 가려본다. 4월은 예쁘게 꽃단장하고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나를 끄집어내어 스트레스도 풀고, 남편과 아이들과 매주 드라이브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이들은 밥 먹을 때도 공부 얘기하는 엄마를 피해 주말 동안 할머니 댁에 갔다. 덕분에 나도 공부 생각은 잠시 잊고 남편과 오랜만에 쇼핑하러 집을 나섰다. 2년 동안 옷을 하나도 사지 않은 남편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이번에는 큰맘 먹고 아이들 옷은 하나도 사지 않고, 오로지 남편만을 위한 쇼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매번 자기 옷 사러 갔다가도 결국 아이들 옷만 사 오는 남편이었는데 오늘은 쇼핑하는 내내 신나 보였다. 마치 우리는 풋풋했던 연애시절처럼 단둘이 외식도 하고 데이트를 즐기며 그렇게 짧은 주말을 아쉽게 보냈다.
남편과 2년 만의 단둘이 첫 외식
다음날 아침 달력을 보니 이제 딱 3주 남았다.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
막연한 중간고사 첫 시험에 대한 초보 중2 엄마의 4월 봄나들이 꿈은 딱 여기까지
4월은 더 이상 벚꽃의 계절이 아니란 것을.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에게 4월은 그냥 닥치고 시험공부하는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줘야 하는 중간고사의 달이란 것을 이제부터 실감하게 된다. 4살 터울인 우리 아이들은 첫째 중2, 중3, 고1, 고2, 고3이 끝나면 또 둘째 중3, 고1, 고2, 고3. 장장 9년 동안 입시 생활의 시작이다. 본격적인 입시생 엄마 노릇은 올해부터. 아들 둘 모두 대학에 입학시킨 후 그때 내 나이는 상상하기도 싫다. 물론 중학교 정도까지만 아이 공부에 엄마 손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일 때 엄마 역할은 좀 더 다른 쪽으로 좀 기울어지겠지. 하지만 대학 입시를 치르기 전까지 엄마도 아이와 똑같이 공부,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임은 확실하다. 나도 억지로 참고 공부해서 대학 입학하고, 취업하고,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결혼 후에 엄마가 되니 육아에 이제 자식 공부, 입시 뒷바라지까지 해야 한다니. 상당히 부담스러운 엄마의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내 인생이 있는데, 우리의 엄마들은 이 힘든 고통을 어떻게 다 이겨내셨을까. 새삼 엄마의 존재가 더 위대해 보인다. 아무튼 아이 공부 봐주다가 엄마가 점점 더 똑똑해짐에는 틀림없다. 절대 치매 걸릴 일은 없겠다.
드디어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
수능도 아닌 고작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가 얼마나 대단한 시험이길래 그렇게나 유난을 떨었나 싶다. 정작 아들은 무덤덤했는데. 사춘기 아들은 여전히 혼자 공부했다. 도서관이나 스터디 카페에 가지도 않고,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오로지 집에서만. 사실 집이라는 공간이 내 공부 의지력을 꺾을 유혹거리가 너무 많다. 공부하기 싫으면 얼마든지 안 하고 누워 잘 수도 있고, TV도 볼 수 있고, 공부 안 하고 딱 놀기 좋은 환경이다. 가족들이 집에서 공부 분위기를 좀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 해줘서 미안한 마음이 컸다. TV 보는 아빠, 동생. 피곤하다고 누워 있는 엄마 때문에 사춘기 아들은 공부가 잘 안 될 법도 한데, 묵묵히 혼자서 공부하면서 필요할 때만 엄마의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혼자 하는 공부는 외롭고 참 힘들다. 사춘기 아들은 마음을 다잡아 주는 유튜브 공부 영상과 함께 힘든 시험공부와 싸우고 있었다.
'실력 차이가 아니라 시간 차이다.'
아마 모든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시험 기간 중 제일 힘든 사람은 엄마도 선생님도 아닌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누구보다 시험 기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어떤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 방법을 터득하여 시험 준비를 잘해나갈 것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옆에서 공부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 주면서 시험 준비를 도와줘야 한다. 공부든 일이든 모든 성공은 '실력 차이가 아니라 시간 차이다.'라고 생각한다. 똑똑하지 않아도 좋은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먼저 준비하고 시작해서 반복한다면 누구나 실력을 올릴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이다. 자신감도 불끈 솟아오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 아들에게 이 말을 자주 해주었다. 중간고사 준비는 겨울방학 때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본격적인 내신시험 준비는 약 5주 전부터 시작했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대충 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부족함을 알기에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미리 준비한다면, 더 반복한다면, 원래 실력이 좋은 아이들과 비교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식 구조화’, ‘생각 서랍’, ‘시간관리’
사춘기 아들과 함께 첫 중간고사 대비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다. 학생이든 성인이든 공부를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네 가지임을. 사실 공부뿐만 아니라 업무를 할 때, 집안일을 할 때, 새로운 것을 배울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지식, 일, 관계들을 모두 시스템화한다면 더 많은 것을 내 머릿속에 구조화하여 서랍 속에 정리할 수 있다. 그러면 필요할 때 빨리 꺼내 쓸 수 있고 더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수 있게 된다. 물론 나도 아직 미숙한 점이 너무 많다.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미루고 있는 일. 생각해 보니 너무 많이 있다. 겉으로 보이는 정리 안 된 집안일, 머릿속에 자리 잡은 복잡한 생각들, 책이나 유튜브 등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받아들인 새로운 정보들, 공부하는 아이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있는 지식들. 정리 안 된 상태로 자꾸 쌓이도록 내버려 두어서 필요할 때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하나씩 정리하며 시스템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면 복잡해 보였던 것들도 어느새 단순해지고 또 다른 지식을 받아들일 여유 공간도 생길 테니까. 이렇게 한 번만 정리해 놓으면 즉, 시스템화하면 수많은 정보가 밀려와도 차근차근 빠르게 정리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쉽게 꺼내 쓸 수 있게 된다. 사춘기 아들도 이번에 내신 공부하면서 한꺼번에 입력된 많은 지식을 감당하지 못하여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공부가 마냥 어렵다고만 느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바로 지식의 구조화와 생각 서랍이 필요하다. 난 엄마로서 이것저것 깊숙이 도와주고 싶었지만 사춘기 아들은 원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번이 첫 시험이고 시험대비 공부를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복잡한 지식을 어떻게 정리하여 체계화하는지 잘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처음부터 물고기를 잡아서 눈앞에 가져다줄 수는 없다. 앞으로 지식을 구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하나씩 가르쳐 주고 사춘기 아들 스스로 잘하기를 기대해 본다.
나에게 공부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내가 엄마로서 두 아들이 하는 공부를 한 발짝 앞서서 먼저 똑같이 해보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만 하는 엄마는 되기 싫었다. 엄마가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놀다가도 자연스럽게 어느새 조용히 공부하고 있을 때가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공부가 어떤 일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는 날이 올 때까지 나도 아이들도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