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 없이 그리는 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때 가능한 일

by 금하나

하루를 음악으로 시작하고 종일 흥얼거리며, 굿모닝팝스로 시작해서 친구집인 지구촌 레코드를 들러서 받은 용돈을 가수 앨범을 사는데 돈 쓰는 게 즐거움으로 빌보드지 차트를 버릇처럼 외우고, 새로운 혜성 같은 popstar 가 쓴 새로운 팝송을 들으면서 마돈나를 보며, 할리우드을 꿈꾸고 잠을 자는 게 내 일과인 모든 일상이 노래로 시작해서 하루종일 노래를 흥얼거리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루틴으로, 초등시절부터 고등시절까지 내 주변의 친구들은 음악프로 순위는 거의 내가 알려주는 줄 알고 있었던 그러니까 특기가 음악감상 취미가 독서인 내가 연극영화과 진학을 모두 접어치우고 산 20살이 되기까지는 나름 외동딸로 속옷 한번 안 빨아보고 산 청춘이었는데, 대체 뭘 해야 하나? 갑자기 우리 집에 쓰나미같이 닥친 가난에 비관할 정신도 울정신도 없이, 거의 음식을 입에 대기 싫은 거식증과 불면증을 앓았고 그탓에 꽤 야무지던 내가 40kg 남짓 메말라가던 약골로 사는 게 몇 년째로 나는 또래 여자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런 내 눈치를 보고 있던 가족들이 짠하고

맘이 아프다가도 뭔가 해야지 맘을 먹어도 늘 하늘은 잿빛투성이었고, 나는 아무런 욕구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며 뒤늦은 심리치료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여러 사례로나마 그때의 나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건 급격히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감이 희망이 없어서라기보다 스스로 그림자뒤에 숨어있던 잠재한 인정욕구가 상처를 받아 반대급부의 반응으로 보이는 결국은 삶과 세상을 향한 반항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그때는 아마도 내가 우울증 환자 같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때 내가 한 단 한 가지 action 은 근래 새로 생긴 취미로 겁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맘에 준비도 못한 체 놀라며 맞은

갓 태어난 조카 그것도 연년생으로 둘이나 아기를 돌보는 일이 전부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땐 마치 내 아기라고 생각하고 키운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을 하지만, 눈을 뜨기 싫었던 그대로 잠들고 싶었던 시간을 잠시나마 악한 세상에 작은 존재를 보내주어 거짓 없는 미소를 한 하얀 천사 같은 조카를 안아보고, 자장가를 불러주고, 뽀얀 볼과 엉덩이를 살짝 비벼주면서 까르르 웃는 그 미소는 숨 쉬는 것도 도와줘야 하는 연약하고 강한 이끌림이 그래 아기 둘이랑 웃어보는 것으로 잠시 뇌리 속에 흐르던 여태까지의 모든 세상노래들과 음악, 사랑노래 가사들은 지워버리고, 마음속에 흐르는 잡음을 모두 꺼두는 작업을 했었나 보다, 그 아기천사는 내가 웃어주면 웃고 먹여주면 먹기도 하고, 통통하고 날마다 달라지고 성장을 하는 모습이 무척 빠르다, 나도 이렇때가 있었을 테지, 나를 비춰보며 작은 미러링이 되었을까? 내 손에 힘을 주는 그 작은 아기들을 보면서 나는 여태껏 당한 더러운 소리와 말들과 상처에 연고를 바를 순 없지만 담을 쳐버릴 수는 있어서 차라리 좋았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아기의 배변냄새가 나기도 해서 구역질이 나면 더 밥을 먹기 힘들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가 된 나는 능숙하게 기저귀를 갈아주는 모든 육아를 소화하며 허드레일이지만 가족이란 울타리가 힘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다행이라고도 여기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을 자손들, 작은 피붙이라고 생각하니 때론 둘을 데리고 업고, 안고 겨울에 얼음 위를 위태롭게 걸어본 적도 있지만, 내가 어디서 그런 힘이 있었는지 나는 고모, 고모, 하는 그 아기천사들이 불러주는 작은 직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고모 나는 그렇게 19살에 고모로 살게 되었다. 그런 새싹들이랑 시간을 여러 해 여러 계절이 계속 지나서 가끔 동네목욕탕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미 결혼을 하기도 했고, 대학생활을 재미나게 얘기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시작한 연예얘기에 정신없어했는데, 나는 벌이가 힘들어진 오빠와 맞벌이를 하느라 미용실에 나가는 올케언니 대신, 3일 밤낮 곱빼기 일을 하는 어머니 대신에 이렇게 두 아이 돌보고 다닌다고 모두 알고 있으니, 가끔 동네에서는 어린 아기엄마가 기특하다며 내가 조카들 엄마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땐 그렇게 조카를 돌보는 일을 새로 발견한 재능으로 생각하며, 생각을 멈춘 정지된 사람으로 살기로 되어 있는 시간표였나 보다 생각한다.

사실 다른 걸 할 맘이 없다 보니까 나는 이미 무심하다 못해 화가 나는 인생에 더 이상 맘상히가 싫었고, 그때에 나는 세상의 일기들이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생각해 보면 나의 불운한 시간과 세상은 너무 달랐다.

세상에 벌어지는 잔치와는 역행하는 우리 집이 너무 슬펐고, 참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말이다.

1988 온 세상이 천지개벽한 아우토반으로 떠들썩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서울로! 손에 손잡고 서울로! 온다고 난리인 올림픽 때 우리 집은 4대째 외동아들이었던 아버지께서 암병원에서 나온 오진을 묵혔다가 암말기를 맞고, 뒤늦게 우리나라에 권위 있는 암센터에서 발병된 지 1년이 체 안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6개월 만에 강원도 깊은 사찰에서 백일정성 기도 중에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이 마른 장작 같이 변하며 숨을 거두는 순간을 맞기까지 어머니와 나는 별짓을 다한 것 같다. 아버지를 살릴 방법이라면 이별과 고통의 그 두려움을 이겨보려고 말이다. 암센터에서는 가장 노련한 박사님을 주치의로 두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검진을 하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간호를 직접 하면서 잠도 식사도 늘 거르시다시피 했고,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더욱 남편을 살리고자 아까운 것 없다고 안 먹고 안 쓴 전재산을 팔아서라도 아버지를 위해 병원비를 쏟겠다고 박사님께 매달렸지만, 결국은 의사의 진료를 따라 방사선과 식이요법등을 다 해본들 때는 이미 늦었고, 그 당시에는 환자가 암을 이길 수 있다고 보는 사례가 없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시대였기에 개발된 치료법이 방사선외에 따로 없었고, 결국 아버지의 고된 삶이 짧으나 죽을 만큼 힘든 투병을 마지막으로 천일기도를 준비했으나 의미 없이 그렇게 끝나신 봄!

커다란 아버지가 떠나고 나니 아버지 삶이 온통 고생과 눈물 외로움의 전쟁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무지 삶이 원망스러워 늘 나는 눈물바다였다, 남들은 사춘기라던 중등시절을 나는 온통 아버지의 그리움과 이별에 고통에 지나고 보니 아버지는 6.25의 참혹한 전쟁을 당하신 시대를 거치며 후천적 장애로 어쩔 수 없는 젊은 날 가난을 견디며 보릿고개도 지냈다고 하셨고,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 죽을 만큼 열심히 사시며 자수성가를 이루셨지만 늘 가슴에 천만 원씩 사업자금을 품고 다니시면서 맘껏 소고기 드셔도 되는 넉넉한 살림이 되었을 때도 동네사람들에게 무이자 학비, 생활비를 빌려주며 살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매번 기름만 잔뜩 낀 돼지고기 비개찌개 한근도 아닌 곡반근과 운동화 한 켤레 사기 아까우신지 늘 고무신을 신고, 전국에 소를 팔러 다니시던 고생하시던 모습이 늘 그 끝에 한은 내가 가지고 안고 살게 되었다. 피땀에 젖은 돈을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못 써보고 아니, 가족이라고 처자식 하고 여행을 한번 가본 적이 없이 우리는 늘 바쁜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린고비 생활에 익숙하게 살았고, 가족이 생일이라고 케이크 한 조각을 즐겁게 둘러앉아 먹어본 적 없는 늘 엄숙한 집안분위기 속에 무엇을 위해 살았을지 모를 아버지의 숨 막힌 인생이 그렇게 슬프고 허망하게 돌아가신 날! 그날이 하필 부처님 오신 날이라니! 득도한 종교를 바라보고 빌었는데 신은 어디 있고 우리 아버지는 데체 극락에 가시는 모습이 도무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랑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천팔백 배를 하며 빌어봤는데 부처님이란 존재는 말이 없고 온 동네에는 절에서 만든 연꽃모양 등불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세상의 종교와 논리가 인생에는 난센스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부터 부처를 믿는 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계속 미래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내 인생에

빛이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기다리던 무언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림자로 사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척박한 일상 속에 유일한 의지의 대상인 어머니의 관심은 오직 장남인 오빠가 어린 나이에 결혼해야 하는 집안의 장손 아버지가 없는 집에 어린가 장인 오빠를 돕고 사는 일이 숙명이다고 여기면서 나는 3년을 넘게 아기를 보살피며 살다 보니 꿈이 바뀌어가는 건지 그저 자석처럼 이끌려 아기를 보면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희망을 앞세워서 유아교육과에 입학을 하고 전공을 바꾸기로 맘을 먹었다.

그것도 편하게 공부할 상황이 아니어서 낮에는 학교, 밤에는 어린이집 보조교사를 시작으로 졸업했다, 동요도 아닌 유아노래들을 부르며 그저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내가 젤 잘하는 건 아기랑 노는 일이다고 매일 다짐을 하면서, 또 집안에서 좋아하고 조용하게 살 수 있고 남들에게 그냥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고 말하는 게 가족에게 별난 계집애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아주 좋을 것 같았다. 포켓볼 장을 이어받은 친구가 가끔 내 뇌리를 일깨우는 소리를 할 때가 있지만,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고 단정 지었다.

사실 막장을 가더라도 노래하겠다는 생각이 너무 내겐 힘들었다, 자주 무서웠고, 워낙 겁이 많아 해지고 집 밖을 나가면 무서워 고양이 울음소리에도 닭살이 돋곤 했는데 심약한 맘으로 무슨 노래를 부를 곳을 찾기는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이미 20살에 예술학과 시험을 치르면서 실패 한 예술세계를 조금씩 맛을 본 경험이 나를 더 주눅 들고 용기 없게 했다. 어머니는 시골 목장을 지키느라 외동딸인 나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던 때라 그나마 어려서부터 나를 예뻐해 주던 생각이 조금 깨어있었다던 막내이모가 내 끼를 생각해 주어 보호자로 참여한 가요대회를 주최한 제작사의 대표가 앨범을 내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제작자와 친밀함을 위해 연애를 해봐야지! 하는 그런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나는 여태까지 오직 노래만 좋아서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 이건 내겐 마치 공포영화의 대사같이 들렸다. 내가 그제 안을 받기 전까지 해본 일은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그나마 사랑을 받고 자라던 유년시절 학예회장을 그만둔 이후로 가수의 꿈은 가슴속에 내 소설에 불과한 현실의 민낯을 본 것 같았다, 당황하던 나를 무시하는 듯한 그때 제작자의 표정을 나는 다시는 같은류의 사람을 대할 맘이 없었고, 결국 체념하면서 내가 할 줄 몰라하는 일을 알고 싶지 않다고 맘의 정리를 했다, 그래 나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치미로 하자, 책이 좋아서 글을 읽고 사는 게 왜 무시당할 일인가? 뭘 모른다고 음악가답지 못한 제안에 내 삶을 지저분히 게 뒹굴려 버릴 순 없다, 왜냐면 나는 이미 순수에 빠져있었다. 그 올망 한 아기의 눈망울 귀여운 힘주어 잡은 손을 느껴보았고, 연예인의 로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소망이 자라고 있었고 삶을

관조하던 마음을 점점 욕구를 만드는 작은 존재들에게 차가운 맘을 조금씩 데워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몸과 맘을 그리고 예술을 걸레조각처럼 취급하는 삶을 허용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게 나의 남은 여성성으로 고귀하게 할 일이라고 고지식이라면 그냥 고지식하기로 했다, 내 나이 21살에 고지식이라니 조금 우스울 수 있지만, 억울함도 올라왔다 사실 아직 첫사랑도 못한 처녀가 이해할 수는 없는 조건과 요구에 가수의 꿈도 실패로 경험하고, 어쩌다 무대제의라고 받은 곳은 나와 전혀 다른 취향의 장르들을 추천받아 트로트나 댄스무대로 밤을 새우는 일은 당연하고 음주가무가 난무한 곳에서 춤도 춰야 하고, 여러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하고자 하는 길이 너무 달랐다.

만약에 배고픈 꿈을 계속 꾸겠다는 각오를 하려면 언더그라운드 가수처럼 통기타를 하나 들고 대학로 연극무대를 뛰어다니던지 그러면서 화장실 청소를 도맡을 생각도 해야 하고, 선배들 담배심부름도 하면서 그렇게 맡기 싫은 담배냄새나, 한 모금도 마실줄 모르는 술을 함께 마시며 젊은이의 아픔과 예술고뇌를 나누는 홍대거리 포켓볼장에서 밤을 새우며 한겨울에 길거리서 8시간씩 기다리며 지나가는 행인역을 당연한 삶으로 살아봐야 예술을 한다고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연기학원에서 주위에서는 드디어 연극과 선배와 미대에 진학한 친구가 유학을 가기로 했다며, 파리에 가면 거지도 멋있다던데 실패하더라도 sadstory 사랑이라도 진하게 해 보고 유학을 거쳐야 예술에 눈을 뜬다는 내겐 납득과 이해가 힘든 이야기가 즐비했다, 정말로 이때 함께 성악에 빠진 동년배 친구는 러시아로 떠났고, 영어를 좋아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던 친구 늘 성숙한 삶의 태도와 단정한 말투로 믿음을 주던 절친이 소위, SKY 대학에 가서 영문학과 장학생이 되었고, 남자친구도 생겼고, 같이 바로 유학을 떠난다던 대학 졸업반인데, 도대체 나는 아무것도 해볼 용기도 무엇을 배울 겨를도 없이 친구들이 모두 어디론가 나방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사는데 재능의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던 조용하던 친구들조차 내 곁에서 모두 훨훨 떠나가는 이별을 겪으며, 그 후론 친구하나 만날 생각 없이 늘 삶이 흔들리는 갈대를 방불케 하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외로운 들풀 같은 고독 속에서 가난한 젊은 날을 보내던 삶이 너무 지루해 휴학을 결정하던 그 봄날 캠퍼스에 밴취에서 쏟아지던 햇빛이 너무 따뜻한 게 짜증이 났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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