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우프체험기 2
언젠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산속에 청정지역을 가꾸며 조금 덜 먹고, 덜 쓰고, 덜 바쁘고, 덜 공해스럽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남들은 이 시대 최고 한량의 꿈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 시작은 대학교 4학년 영문학과 수업에서 우연히 만난 에머슨의 <자연>이라는 책이었다. 영수필 시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지만 그 책과의 만남은 내 피 속의 어떤 지점을 건드렸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신이 모든 곳에 편재한다' '신을 만나고 싶다면 자연을 들여다보면 된다.' 이런 메시지가 강렬하게 들어오며 서양에서도 이런 인식을 가진 멋진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에머슨에 대해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고 <월든>은 잊을만하면 떠올라 나를 설레게 하는 책이 되었다.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전에 한 번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두 분이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시대와 국경을 거슬러 21세기를 살아가는 시골 대학교 한 여학생과 깊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들의 영향을 받은 스캇 니어링과 헨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읽을 때에는 가슴이 너무 설레서 잠을 청할 수 없을 만큼 내 안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나를 흔들고 잠 못들게 하는 숲 속 생활이 나와 상관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멋지지만, 나는 도저히 실현하기 어려운, 꿈 꾸는 것만으로도 멋진 삶들을 가슴에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우프와의 만남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나도 숲 속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할 수 있는 인연이 무르익은 것이다. 우프 책자에 쓰여있는 고귀한 이상이나 농사짓고 싶은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단순 도피였다.
나를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어딘가로 달아나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 누구의 기대나 요구, 그간 내가 나에게 부과한 모든 의무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온통 자유롭게 걸림 없이 모색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회는 전혀 예상밖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때는 여름. 수박을 먹으며 신문을 보다가 수박씨 한 알이 우연히 떨어져 닿은 곳에 "너, 우프 아니?"라는책 소개 기사가 있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우프라니? 궁금한 걸 잘 못 참는 성격 덕분에 적극적으로 알아봤다.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사무실 위치를 확인한 후, 다음날 바로 사무실로 출발했다. 워킹할러데이 사무실이었다. 저자인 이창렬 씨를 만나 우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바로 호주행 우프여행을 신청해 버렸다. 될 일은 이렇게 된다. 수박씨 한 알의 인연으로 궁금하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전화를 걸고, 사무실을 찾아가, 신청을 하면 끝이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가면 되는 것이다. 많은 생각이 필요 없었다. 이미 내 안에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이미 싹을 틔운 채 자라나고 있었으니까.
잊지 못할 소중한 만남의 시작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땅, 호주 그리고 브리즈번.
인생은 우리를 사랑한다. 늘 아끼고 돌보지만, 때가 되면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끌고 돌번다. 때로는 자신도 인식 못하는 절실한 소망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으면 그렇게 수박씨 한 알 마저도 제 역할을 다 한다. 신기할 뿐.
그렇게 우프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제 짐을 꾸리고 출발일이 오면 비행기에 몸만 실으면 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