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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an 31. 2023

가난의 위기를 대비해 진행하는 행복수업입니다

  해묵은 물건들이 집안 곳곳을 지키고 있다. 연륜은 깊지만 아직 성성해서 같이 늙어가는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니 든든하다. 곡진 세월만큼이나 마주한 시간들이 도열하면서 늙어가는 서로의 여정을 격려해주는 것만 같다. 한동안 차갑고 딱딱한 질감에 고정돼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해묵히며 생물로의 변신을 거듭하더니 점점이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그런 모습을 접할 때마다 새삼스러워 하며 상기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말을 걸거나 얼굴을 비비기도 한다.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누구인들 이 같은 물질들을 가리켜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명을 일으킨 찰나의 순간은 노련해진 노년에야 예리한 섬광처럼 번득이지 않을까 싶다. 더 늙어 나이 80에 이르면 마음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설렘이 벌써부터 일렁인다. 오늘 이 같은 물질들과 머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재활용쓰레기 처리하는 날엔 멀쩡한 물품들이 솔찬히 나온다. 가구와 생활소품들이 가장 많다. 사용기간이 아직도 유효한데 유행이 지나 싫증을 느끼고 이사를 가면서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이다. 내겐 오랜 세월을 통과해 전진하는 전자제품 삼형제가 있다. 맨 먼저 소개될 15살 난 브라운관 TV는 지금까지도 멀쩡하다. 고마운 생각에 퉁퉁 건드리며 말을 건넨다. “기특하시기도 하지, 나이 드셨어도 이렇게 잘 보여주시다니 감사해용~” 16년 된 김치냉장고도 끄떡없다. 가끔씩 기능이 녹슬지 않도록 여러 개의 버튼을 툭툭 건드려줄 정도의 반응만 건넨다. 이사 과정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져 부목인 상태에서도 불편한 기색 없이 잘 있다. 같은 연령대인 세탁기 통돌이는 어떠한가. 뒤 베란다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자연 관심이 덜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의 대면에도 녀석은 외로움을 타기커녕 자못 의연하다. 각종의 세탁물을 통째로 삼켜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며 신명나게 해치우는 기능은 놈의 주특기다. 에너지 측면에서도 알뜰살뜰하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햇볕 좋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럼형의 세탁기가 가당치 않을 뿐더러 전력소모량만 클 뿐이다. 원래 햇볕이 부족한 나라에서 개발된 유럽풍의 드럼세탁기가 들어와 토착화된 토종을 밀쳐낸 형국이다.  

  이 외에 빠뜨릴 수 없는 녀석이 추가된다. 40년을 훌쩍 넘겼을 기능성 나무식탁이다. 4인 전용의 구조지만 1인가구도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신축성을 지녔다. 좁은 공간에 설치 가능하도록 테이블 양면에 날개를 달았다. 인원수에 맞게 접었다 펼칠 수 있게 제작된 것이다. 접이식 나무의자도 사용할 만큼 개체수를 꺼내 쓸 수 있게 테이블 중앙에 저장 공간을 만들었다. 기염을 토할 만큼 독특한 구조의 아이디어상품이다. 지금까지 사용하는데 어느 한 구석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해주고 있다. 단지 세월의 흔적으로 때 국물이 지고, 나무  결의 일부가 얼룩덜룩할 뿐, 존재감엔 아무런 손상이 없다. 이런 제품을 만든 이들에게 향한 감탄과 감사한 마음이 절로 솟구치게 하는 부분이다.    

  그들로 인해 누려온 내 삶이 얼마며 그 곁에서 함께한 내 성장의 시간도 소중할 수밖에 없는 지금. 기능 높인 신상품에 현혹돼 가용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퇴물 처리할 수 있을까. 이 편리한 물건들이 없었다면 내 손과 발이 힘든 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록 물질로 탄생했지만 생명력으로서 우린 서로 연결되어 있고, 두터운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의 파장에 몸을 맡긴 채 공동체적 뿌리까지 내리기도 한다. 이러니 새로운 기능이 정착된 새 제품의 홍보가 쏟아져 나와도 눈길을 보낼 수 없는 까닭이 된다. 온갖 유혹이 뻗친다 해도 끄떡하지 않겠다. 고장이 나면 수리해 사용할 것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중고품으로 구입해 대체하리라. 그런데 이 같은 각오에도 찬물을 끼얹게 하는 사진 한 편이 눈에 밟혔다.


  ‘물건들의 무덤’ 그냥 돌무덤도 아니고 세계 곳곳에 버려져 아직 쓸 만한데 수명을 일부러 폐기해버린 물건들의 무덤을 지칭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스마트폰 사용 폭증으로 필요 없게 된 공중전화부스의 무덤, 중국 충칭 외곽에 버려져 무용지물이 된 택시무덤, 서아프리카 누아디부 항구 배들의 무덤, 항구가 쇠락하며 생겨난 닻들의 무덤 등등. 모두 처리비용 이유를 내세워 방치된 사진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사용주기가 겨우 2.7년에 불과하도록 제조된 스마트폰이 향후 주범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에 들어가는 광물이 무려 60여 가지라 하지 않나. 광물채굴과 정련과정에서 소모되는 전력과 망가질 생태계 그리고 저임금에 동원된 아동들의 노동착취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새 제품을 개발하고 소비를 조장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향후 또 어떤 물건들이 무덤의 자리로 추가될까. 기겁할 일이 또 있다. 팔리지 않은 명품의류의 재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게 된다면 말이다. 의류업체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땡 처리하지 않고 멀쩡한 것들을 모두 소각 처리한다고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언제까지 이 지구의 공공재를 아끼지 않고 펑펑 써버리는 작태를 멈추게 할 방도는 없는가. 지금으로선 쉽지 않으니 절망에 가깝게 느껴진다. 

  요즘 세상은 겉으론 멀쩡하다 못해 평온한 듯 보인다(TV화면에 내비친 예능프로그램 상의 화려함 속에서). 하지만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칙칙해질 텐데. 97년에 겪었던 외환위기를 넘어선 미증유의 가난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럴 때 오히려 가난이란 삶의 기울기를 각기 포착함으로써 그 반등작용으로 본질에 치중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기회로 삼아보면 어떨까.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 생활의 무게를 줄이고 나아가 최소한의 물건을 지닌 일로 가난 속에서도 참 행복에 머물 수 있는. 이럴 때 물자절약 운동이었던 옛 *아나바다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재개해도 좋을 듯싶다. 나와 같은 할머니세대는 가난을 겪어온 터라 그나마 문제시 되지 않는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어려움에 봉착할 젊은이들이 마음에 걸릴 뿐이지. 하지만 생활비를 아껴 어려운 환경을 슬기롭게 넘긴 어느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접하며 마음이 놓인다. 강요된 가난과 내가 선택한 가난한 삶은 확연히 다르다. 윤구병 교수의 저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에서 “가난은 나눔을 가르쳐준다. 잘 사는 길은 더불어 사는 길이고 서로 나누며 사는 길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가난해질 일에 미리 주눅 들지 말고 겁먹지 않기를. 적응하면 그런대로 뜻하지 않은 일까지 성취하리란 점은 자명하니까.  



* ‘아나바다 운동’ – 자원 재활용을 실천하려는 운동.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란 말을 줄여 만든 이름.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전 세계에서 퍼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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