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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an 17. 2023

돌봄이 요구되는 관계

 셀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이 우리 삶을 관통한다. 젊은 날엔 찰진 만남의 속도로 허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둘러싸인 사람들 속에서 활기가 넘쳤고, 그 익숙함에 오래 머물리라 착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항상성이 깃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가 보태질수록 여남은 절친 숫자마저 쪼그라든다는 점도 추가 배송되지 않든가. 너무나 당연하지만 만남은 조건에 의해 성립되는 속성이 있다. 조건이 맞으면 지속되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는 핵심이 단순명료한 결과로서 안긴다. 젊어서는 딱히 와 닿지 않던, “평생을 걸쳐 참된 친구를 2~3명이라도 지녔다면 행운이다.”라는 지난날의 말이 새삼 새롭다. 노년인 지금, 이 말이 내 귀에서 맴도는 이유는 뭘까.  


  오랜 우정과 꿋꿋했던 관계가 부지불식간에 빛바래진 경험을 마주한 적이 있으리라. ‘친구와 장맛은 오랠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된 벗을 칭송하는 말이지만 단지 물리적인 시간대가 산적하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부분이 아니다. 쌓인 포인트 숫자만 믿고 즉흥적으로 사용될 가용재원 쯤으로 여기는 그들만의 우정 방식. 돌출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에서 과연 숨결이 붙어있을 수 있을까. 의미가 퇴색된 채 퇴행된 인연의 머묾은 우리주위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이다. 진정한 우정이란 오랜 시간을 들여 공과 실패의 과정을 거친 물오른 숙성상태다. 노련함이 담긴 깊은 내면의 원천이다. 제대로 알고자 노력을 기울인 쌍방의 결과다.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성사될 수 없는 일이니까. 

  꿋꿋했던 절친 몇몇은 해외이민을 떠나 뜻밖의 이별을 낳았다. 1970년대에는 더 나은 꿈을 쫒아 너도나도 이민을 추구했던 시절이다. 남겨진 지인들도 서로의 환경이 바뀌고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관계가 서먹해졌다. 관계가 뜸해지면 균열 또한 서서히 일기 시작한다. 명색을 유지한 관계에서도 별일 아닌 일이 오해로 번지며 흉터를 남기곤 했다. 되돌아보면 정말 싱겁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어릴 적 생각들은 고만고만했는데, 성인으로서  입지를 굳히며 함께 자란 가치관이 서로에게 배치돼 마찰을 일으킬 줄이야. 동일한 가치관으로 만나게 된 사회친구가 어릴 적 벗보다 밀도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일은 허다하다. 질적 관계로서의 이동인 셈이다. ‘비혼’인 나는 오랜 시일 옛 벗들과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가족 안에 묶여있었다. 그들과 나눴던 보편적 언어마저 실종되더니 임계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때는 그들과의 관계를 고려하고자 내 삶을 퇴행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멀어져간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나도 늙어가는 탓일까 옛 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이제 살날도 많지 않으니 그간에 머물렀던 간극도 좁히지 못할 건 뭐 있겠는가. 그들도 나와 같은 여유로서 훌훌 털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새해 들어 용기를 냈다. 한 동창생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무심히 흐르듯 옛 정취가 목소리에 담겼다.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고 그저 무탈한 감성을 나누었다. 나의 ‘비혼’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껏 이어질지도 모르는 인연이 아닐까. 그랬던 ‘나’로 인해 생겨난 미안한 마음을 친구에게 에둘러 전했다. 잘 살펴보면 내 주변에서 스쳐간 많은 인연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은 나의 잘잘못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난 날 어리석음의 점철로 지니게 된 부정적 감정을 ‘나’부터 털어낼 때가 되었다. 하나씩 남겨놓은 잘못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사과할 뜻을 굽히지 않겠다. 이렇게 나의 허물부터 돌아보는 것으로서 나의 여생을 맞으리다. 


 인연의 고리란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 같아서 서로의 돌봄이 뒤받쳐주지 않으면 멸종해 버리는 몸 안의 세포와도 같다. 그러므로 인연을 재정비할 시점이 ‘지금’이라는 점도 놓쳐선 안 될 일이다. 중요한 일들이 사소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문제는 ‘결론’에 머무는 일에서 한걸음 나아가 행동으로 옮긴 ‘결심’이 아닐까싶다.  

 장고에 들었다. 현재 잇고 있는 교류에 최선을 다 하자고. 우리와 같은 고령세대에게는 ‘다음 기회’가 허용치 않는다. 언제라도 촌각을 다툴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고마운 인연들과의 내적 영감을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 채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지금,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정돈된 내 마음을 기울이기로. 혀를 통해 흘러나올 말을 미리 알아차리는 일이다. 결이 고운 말로 이어지도록 마음을 챙기는 일상의 수행이다. 올 들어 부쩍 이 같은 열정에 불을 댕겼다. 작년까지 나의 주된 관심은 사회공헌이 아니었던가. 오랜 동안 자식처럼 ‘시민단체’를 보살펴왔으니 이젠 ‘특정 인물’을 향해 돌보는 일로 갈아탈 차례가 되지 않나 싶다. 지속적인 돌봄 명단엔 나도 추가돼 내면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일로 번져갔다. 책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무한한 힘을 믿기에 더욱 가까이 하기로 말이다. 행복으로 차오르는 치유의 시간을 제공하는데 독서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손만 뻗으면 늘 가까이서 무료함을 달래줄 친구와 같은 즐거운 일도 마련했다. 철퍼덕 앉아서 좋아하는 일과 이리저리 뒹굴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 좋은 인연들과 오래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한하니, 변함없는 동반자적 관계를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에서 찾을 필요가 있을 법도 하다. 그런 나의 선택은 붓글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을 내어주기보다 받는 데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性)을 떠나서 사랑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 또한 이 같은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자신의 결핍과 허기를 달래줄 상대를 찾아 그에 기대려는 마음이 크다보니 ‘사랑’의 참의미를 제대로 익혀갈 수 있었을까. ‘사랑’은 곧 ‘관심이며 꾸준히 이어지는 돌봄’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유지해가려는 노력이 뒷받침돼야 제대로 된 ‘관계’를 이룬다. 돌봄의 기본기 없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지, 돈독한 관계선상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들지 않았는지 누구나 되돌아 볼 필요가 이를 받쳐주는 존립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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