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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Feb 12. 2023

추모를 통해 끌어올린 내 노년의 선물

   ‘고독사’로 이어질지 모를 죽음들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홀로 죽음을 맞는 일이 무연고자 아닌 내 경우로 다가올 수 있는 겁니다. 혼잡한 도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혼자이거나 이룬 가족이 있다고 해도 유사한 일에 놓이긴 매한가지죠. 1인가구의 비율은 전인구의 1/3을 이미 넘어섰고 일구는 가족구성원도 예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제 해가 거듭될수록 예측 불허의 죽음으로 내몰릴 우리 목숨이라고요. 

  자녀들도 빠른 변화에 대처할 일들이 증가해 당황스럽습니다. 따라잡아야 일이 산적해진 그들의 고된 삶은 이미 진행됐습니다. 우리세대 보다 월등한 실력을 쌓은 그들이지만 현실은 이런 점을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녹록치 않은 현실에서 당면한 ‘먹고사니즘’에 꽂힐 지경이지요. 이에 더해 미래의 다면적인 변화는 또 어떤 가속과 질량으로서 달려들지 모를 일입니다.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우리 자녀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늙고 병든 부모의 돌봄을 예전처럼 요구할 수 있을까요. 부모세대 보다 여의치 못한 경제 환경에서 제때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타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노인들은 임종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자립적으로 준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어쩌면 내 마지막 임종까지 가족을 대신해서 지켜주는 AI와 맞닥뜨려도 놀랄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초상을 치루는 의미를 되새기고, 언젠가 갑작스런 ‘나 홀로 죽음’을 맞더라도 의연해지도록 마음을 챙겨보렵니다. 


   예전 장례식은 마을사람들의 참여로 치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멀리 있는 혈육 보다 가까운 이웃과 쌓아온 시간이 축적되면서 친척 이상의 의미를 담아냈단 뜻입니다. 이웃은 오랫동안 익숙하게 지낸 고인을 잘 알기에 애도의 무게감은 혈육 못지않았습니다. 가족과 진배없이 마지막 떠나는 고인의 삶을 그들만의 익숙한 몸짓으로 추모했으니까요. 이 같은 장례절차는 지금 박제됐지만 그 예술성은 살아남아 우리의 고유문화로 정착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타령으로 그때로 회기하자는 건 아닙니다. 추모의 기울기를 새롭게 정비해 환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요즘의 장례의식은 어디서나 판박이처럼 똑같습니다. 집이 아닌 병원영안실에서 주선한 프로그램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상주의 입장에서 봐도 편리하고 효율적인 조합입니다. 고인은 별도의 냉동실에 안치돼 문상객과 떨어져 있습니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오가는 대화가 실종된 채,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만이 고인임을 알릴뿐입니다. 조문객들은 상주얼굴에 도장을 찍고 나서 막 일을 마쳤다는 듯 아는 얼굴들을 찾습니다. 자리에 착석하면 자동적으로 음식이 나옵니다. 벌건 색의 육개장(다양한 메뉴가 마련되기를)은 초상집 단골메뉴로 고정돼 당혹스럽습니다. 곁들인 반찬들도 거의 유사합니다. 그나마 사회 저명인사의 장례식에서는 인파가 몰리지만 그렇지 못한 서민들의 장례식장은 대부분 썰렁합니다. 그럼에도 이 같이 고착된 장례문화를 주관 없이 무조건 따르는 이유를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고인을 위한 추모의 장이라기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식에 무게를 둔 까닭입니다.

  이를 계기로 가족끼리 조촐한 추모의 공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조문객수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우리 가족들만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창출해볼 기회로 말입니다. 고인이 기뻐할 것입니다. 바쁜 시대에 그런 준비를 할 수 있느냐고요. 어렵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가족 앨범이 있을 테니 고인과의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습니다(미리 부모님과의 추억 사진을 많이 찍어놓기를). 고인의 애장품도 나열해서 그 안에 담긴 일화를 나누고, 식이 끝나 돌아가서 각자 나눠가진 유품으로 추모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고인에게 못 다한 자식들의 마음끝자락을 촉촉이 적실 애도의 시간이 길어질 것입니다. 체면차림에 인사차 문상 온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왔다가 잠시 머문 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헛헛한 장면 보다 나을 테니까요. 


  요즘처럼 번잡한 세상에서 부모의 임종을 지킬 자녀는 얼마나 될까요. 오래된 제 기억을 소환합니다. 개인병원에 입원해있던 아버지가 소생이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이부자리에 누인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아버지 곁에 둘러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후 어김없는 시간이 닥쳤습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였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몰아쉬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 대문에는 상갓집임을 알리는 조등이 내걸렸지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조객의 대다수는 친척 보다 동네 이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연락이 수월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 흔해빠진 전화도 집집마다 지니지 못했던 1960년대의 사회상이었던 것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부산한 가운데 지인들의 조력을 받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3일장을 그렇게 집에서 치러냈습니다. 장의사의 출장으로 소독처치를 끝낸 3일간의 주검은 썩지 않음을 그때 알았습니다. 요즘처럼 조리대 화구가 여러 개도 아닌 오직 십구공탄 화력 하나에 의지했던 시절이었는데. 찾은 조문객을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일을 일사분란하게 치러낸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내 나이 16세였습니다. 

  1988년 어머니의 장례는 지금처럼 집이 아닌 종합병원 영안실이었습니다. 암 투쟁으로 연명을 이어가던 어머니가 누워있는 중환자실에서 다급히 보호자를 찾았습니다. 갑작스럽게 나 홀로 임종 아닌 마지막을 지킨 게 다였습니다. 아버지 죽음에 이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다는 명분 쌓기에 도취된 나는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고 안도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병상에 머물러 있기에는 어린 나이었죠. 그리고 아버지의 돌봄은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라 미루어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 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병든 몸과 마주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며 양가감정마저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자식 된 기회를 만회할 시간을 벌었다는 기쁨을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머니가 최후통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식 된 도리를 뒤늦게 회복한 ‘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이전, 늙어가는 모친의 삶은 내 눈에 잡히지 않았으니까요. 젊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모에 대한 감성이 뒤늦게 늙고나 서야 눈물겹도록 피어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헤쳐 나갈 삶에 매몰돼 어머니 노년을 살필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부모의 영감과 위로가 스며있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쳤던 겁니다. 예전 부모의 삶 가까이서 의지했고 돌봄과 존중으로 이어온 삶이 지금 밑거름이 되어 어떤 낯선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맞짱을 뜰 의지를 키워낸 사실에 감사해 하면서 아쉬움도 남습니다. 우리세대에겐 쑥스러움에 차마 하지 못한 ‘사랑 한다’는 말을, 끝내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겁니다. 무심한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낸 우리가족이었던 것입니다. 나 이제 홀로 죽음에 임할지라도 부모의 유산인 사랑의 에너지로 활활 태우며 의연해지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부모님 추모로 내 심연에서 길어 올린 선물이 새 생명체로 뒤바뀌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지금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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