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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Mar 19. 2023

내 〈비혼〉의 반조

  짝을 이루지 않고 살아온 지 40년이 넘었다. 요즘 결혼은 선택사항이지만 당대에는 인륜지대사란 인식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가정을 이룬 후에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여자의 모습 또한 당연하게 요구되었는데. 그때 여성들은 극소수의 전문직만 제외하고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는 게 통념이다 보니, 경제권을 거머쥔 남편과의 종적 연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뿌리치고 홀로 선 일은 종교적 출가가 아니면 주위의 낯선 시선을 감수할 일로 직행하였다. 그 시절 홀로 사는 여성의 모습은 지금처럼 다양한 삶의 형식으로 인정되지 않을뿐더러 호기심과 비난꺼리에 불과했다. 한결 시선이 누그러진 요즘에도 ‘혼자’라는 걸 안 주변인이 던지는 묘한 눈빛은 불편함으로 머물렀다. 아직도 고질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는 뜻이다. 아예 대놓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일거라는 근거 없는 낙인을 찍어낼 때는 아연실색하였다. 당시 나의 선택은 내 생존에 걸린 문제였고, 나선 김에 틀에 박힌 여성의 굴레에서 속박 받지 않으려는 내 의지가 작용했을 뿐이다. 


  보편적 결혼의 관문은 내겐 여의치 않았다. 이렇듯 내게 일어난 일과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곰곰이 되새기며 숙성의 과정을 거쳤다. 아닌 길을 애써 가려하지 않고 스르르 열린 길을 만나 안도했다. 그러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대처능력이 샘솟는 듯하였다. 그런데도 내 생각대로 살고자하는 바람이 시대를 앞선 까닭이었을까, 홀로서기는 실로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문제해결의 꼭지점에서 나 홀로 거친 바람을 맞았으니까. 그로써 거둔 일은 그 극기 점을 통과하며 내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본 계기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타고난 진보적 사유의 소유자인 반면 내게 놓인 현실은 그렇지 못해 일어날 충돌이었음을. 평소 직면한 사회에서 느낀, 인식과 시류의 흐름을 잘 읽어내는 편이다. 한편 반듯한 뜻을 지니다 보니 섬세하고 민감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홀로 맞설 힘이 달릴 때에는 까칠함마저 노출시켰다.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일, 말도 안 되는 사회적 논리에 간담을 태운 시절도 시나브로 지나갔다. 평생 보장받는 공직을 박차고 나와, 결자해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옹골찬 결심으로 둥지를 튼 여럿 흔적은 지금 돌아봐도 뿌듯하다. 


  첫 둥지를 튼 건 사회사업이었다. 당시 정부노인복지의 지원은 ‘불우 노인’만 대상이었다. 누구나 노인이 될 텐데 언제까지 선택적복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기다릴 새 없이 내 미래를 위해 ‘일반노인’을 대상으로 한 현장에 첫 삽을 떴다. 실비 형 노인복지사업을 민간주도인 나의 재정으로 시도한 일이다. 지금 요양보호사업의 전신이었다. 남이 거들떠보지 않은 일에 뛰어들어 개척의 어려움은 기본이었지만 그만큼의 긍지와 보람은 배가됐다. 노인 돌봄 가정으로부터 응원 받은 일로도 기운을 냈으니까. 하지만 사업은 1997년 IMF외환위기사태가 밀려와 복병으로 작용됐다. 쪼들린 가정살림은 노인에게 지급될 돌봄 비용부터 줄여가는 사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에 뿌리내린 간병사업과 파출부사업 등 유사업체에서 우리의 일을 유리한 고지에서 앗아가려 했고, 벤치마킹해서 운영에 혼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런저런 사유로 결국 사업을 접게 되었고 억대의 자본금은 공중 분해됐다. 하지만 지금의 요양보험제도에 밑거름이 되어준 일로 삼아 후회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궤적을 쌓았으니까.


  두 번째는 내게 주어진 재산을 사회 환원한 일이다. 주저 없는 행동이었다. 아직까지 나이든 사람들의 기부는 장학금을 선호하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입신양면의 문화, 유교 영향을 받은 우리사회는 지나친 교육열을 낳았다. 이 기부는 교육향상에 긍정적인 면을 끼쳤다하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소외감을 안겼다. 배움의 길이 열린 자만 지원사격하는, 그와 같은 쏠림현상은 결국 엘리트사회를 양산하고 나아가 사회 불평등을 낳지 않았는가. 공부만 잘해 우월감에 빠져 교만해진 일부 사람이 훗날 윗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면서 저지른 해악을 우린 목도하지 않았던가. 진짜 공부는 사회를 통해 얻어지는 공부일 것이며, 인생을 통틀어 영혼을 쏟아 붓지 않고서는 참 공부에 이르지 못하는 것. 그 곳에 네 영혼이 있으라, 네 영혼을 담그라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에서 자라나고, 깨어있는 시민이 많아야 견고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데에 평소의 지론을 나는 펴왔다. 그런 계기로 이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시민단체에 내 관심의 손을 내민다. 그로써 부모로부터 받은 큰 유산을 한 시민단체에 선뜻 기부했다. 오랜 기간 유지해온 결심을 행동으로 실천한 것에 안심했다. 다만 기부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 혹독한 일도 치러야했는데. 장학생을 위한 기부는 개별적 대상에 한정돼 보람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 반면 재정이 열악한 시민단체는 기부의 효과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보람과 성취감을 거두려면 오랜 시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요구된다. 마치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돌봄이 이어지듯이, 아이 자라듯 성장해가는 시기를 묵묵히 바라봐야 한다. 이렇듯 가슴 졸이며 세상밖에 내놓은 자식들 여럿이 내게 있다. 초반의 걸음은 고됐으나 말미로 갈수록 체화된 자력갱생으로 차오를 날도 멀지않으리. 


  ‘비혼’으로 살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우연한 땅에 뿌리내린 여느 생명체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내 듯, 나 또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고 살아갈 뿐이라고. 이렇듯 내 생각대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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