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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Mar 31. 2023

생면부지의 이웃에게 불쑥 내민 선물

  이 아닌 밤중에 웬 소리일까. 깊고 깊은 밤, 귓가에서 맴돌다 멈추길 반복하는 울음소리에 짜증이 났고 깨고 나서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건 분명 서럽게 우는 여자의 흐느낌 소리였다. 이 무슨 기괴한 일인가. 안되겠다 싶어 전등을 켜니 새벽 3시에 한 뼘 미치지 못한 시계의 눈금이 내 눈과 맞닥뜨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 이길래 단잠을 방해하려는 자, 대체 누구인가. 마치 범인이라도 잡을 기세로 일어났다. 귀를 쫑긋이 하고 제일 먼저 베란다 문을 열어젖히며 창밖을 수색했다. 그런데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지 않나. 방안을 다시 살폈더니 화장실 옆 작은 방의 벽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우리 집 벽면과 밀착된 부분에서 배어나온 울음소리란 단서 하나로도 옆집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내 측은지심이 들며 마음이 진정되었다.


  얼마 전의 일과 맞물려 있다. 밖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소리가 났다. 청소용역 여러 명이 우리 집 3층 아래 도로변에서 럭스를 붓고 연결한 호수의 물로 뿌려대며 닦아내는 게 아닌가. 왜 독한 럭스를 쏟아 붓는 건지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봤다. 담날도 여전히 닦고 있었다. 궁금해서 나가 물었다. “사모님 모르세요, 그저께 밤 옆집에 사는 남자분이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그 사건으로 바닥에 묻은 피를 씻어내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섬뜩했다.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사고라니. 사고가 일어난 밤 10시 이후, 그 무렵 나는 이미 잠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곤히 잠들 수 있던 것은 소음방지 창호 덕택에 차단효과를 본 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사건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현장을 지나쳐 볼 일까지 봤다. 사고 후 여러 날, 그 집에선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기혼의 딸이 홀로된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는 말만 들었다. 고인은 회복되기 어려운 암에 걸렸고 우울증까지 겹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파트 주민 몇몇은 그 일에 대해 속닥속닥 거렸다. 한참 떨어져 고층에 위치한 한 주민은 20층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내다보게 되었다며. 멀리서 본대로 끔찍했던 장면 하나하나를 집어 설명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바로 지천에 살면서도 즉각 알지 못한 내게 놀라며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소리는 위로 더 잘 퍼지는 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맘속으로 살짝 했다. 그러면서 이 소곤거림 이면에 불상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외면하려는 무리 속에 나 역시 녹아들지 모를 일이란 점을 포착했다. 제 각기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남의 사정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품기란 쉽지 않은 요즘이니 말이다. 뒤늦은 일이었지만 잠을 설친 계기가 오히려 미망인과 접속할 기회로 맺게 되다니. 이 일을 빌미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이럴 땐 참 괜찮은 용기가 될 터이니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껏 이 아파트에 살면서 얼굴을 익힌 주민들이 몇몇 있다. 대개가 동물을 사랑하다 보니 강아지 산책을 통해 맺어진 인연들이다. 초기엔 강아지를 주연으로 내세운 그들의 얼굴이 작았지만 어느새 뚜렷한 인물로 확대돼 왔다. 왠지 모르게 코드가 맞는 몇 명의 강아지 맘들과 나눈 감성이 만날 때마다 포인트처럼 쌓여갔다. 다만 잦은 이사로 정든 사람들이 떠나는 일로 아쉬움이 뒤따르니 이를 어쩌리. 이로써 아파트란 공동주택에 살면서 공동체해체와 삭막해져가는 관계형성에 대해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다.  


  심각한 질병은 잘 정착해 살던 이들의 삶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는다. 자살한 그 분은 그의 결단으로 끝을 냈겠지만, 곁을 돌본 반려자의 삶 또한 송두리째 부인되는 현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리라. 남겨진 이에게 이 같은 상황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런가. 사망에 이를 만큼 작용했던 복합 배경이 고인에게 없지 않았겠지만, 굳이 알 까닭도 없다. 다만 그의 죽음 이면에는 반려자의 삶을 전혀 고려치 않는 전형적인 이기심이 발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대목을 만나면 가슴이 시려온다. 있을법한 정도의 차이나 따른 상황을 거론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렸다고 누구나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되레 담담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들과의 마지막을 섬세한 사유의 시간으로 채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치료과정에서 과다한 경제적 부담도 따르겠지만 가족들과 이룬 승화된 시간과 맞바꿀 만큼 금전적 압력 앞에 꿇어 자살로 마감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얼마 전 그 집 부엌에 켜진 불을 보고나서야 미망인이 돌아왔음을 알았다. 


  나는 가까운 꽃시장을 찾았다. 봄을 맞아 이미 피어오른 여러 색의 꽃과 나무들이 환호하듯 반겨주고 있었다. 식물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올해에도 베란다를 화려하게 장식해줄 꽃들을 때맞춰 구입하려던 중이었다. 한련화 천리향묘목 그리고 미망인의 선물로 어울릴 듯해 제라늄을 구입했다. 제라늄은 사계절 내내 베란다에서 잘 자라는 특징과 꽃도 오래가 가꾸는 재미가 쏠쏠한 놈이다. 생면부지의 미망인을 생각하며 여러 색의 제라늄 중 가장 화사한 분홍색으로 택했다. 귀가해 가지고 있던 자기화분에 옮겨 담으니 더욱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나는 흡족했지만 미망인은 어떨지 모를 일이다. 곁들여 그림엽서에 몇 자의 흔적을 남기고는 그 집 현관 앞에 몰래 놓고 돌아왔다. 행여 미망인에게 외람된 글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넣었다. 내 작은 선물로 그녀에게 일어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면 좋겠다. 내민 내 손이 부끄럽지 않도록.


  이 글을 마무리하는 중에 그 미망인으로부터 화답이 왔다. 우리 집 현관 앞에 제과점 케이크와 함께 꽂힌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 따뜻한 주민이 계심을, 또 위로와 응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화분은 물도 잘 주고 잘 키워보겠습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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