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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Apr 10. 2023

나무의 품격

  가뭄 끝에 내린 단비가 도시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겨주었다. 배정받은 비좁은 장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온 가로수. 비 그친 뒤에 그들의 몸이 한껏 달았다. 겨우내 잠들었던 잎눈을 틔워내 칙칙한 몸뚱이에 걸친 녹색 옷을 부지런히 짓고 있는 중이다. 회색빛 도로변에서 파릇파릇 비집고나오는 여린 이파리들을 바라보다 보면 이처럼 경이로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도시인들의 갖은 천대와 훼손에도 거리낌 없이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해낸 그들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모니를 이룬 녹색의 퍼레이드가 도시민들의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우러러보게 하는 등 흡사 마술을 부리는 것인양 느껴졌다. 이렇게 도심의 녹지라도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주변의 정원도 이즈음에 돌아보기로 했다. 굳이 꽃구경에 나서지 않아도 지금 우리 집 베란다는 꽃 잔치로 성황중이다. 그리고 바깥 풍경 또한 봄의 정 가운데에 있다. 겨울철 나목에 고운 연두색을 입히는 봄철 작업부터 결실을 맺는 가을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수고한 잎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이 단풍이라 했던가. 단풍으로 물든 무렵이면 산 전체가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들로 어우러지며 모자이크 무늬로 절정을 이룬다. 우리도 생을 마무리할 즈음 어떠한 채색의 성적표를 받아보게 될까. 이 같은 자극과 함께 천연의 모습은 아니지만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바깥 정원풍경이 집안까지 와락 당겨오는 곳이 있다. 바로 우리 집이다. 

  13년 전, 이 집을 선택하게 된 배경 1순위는 잘 꾸며진 외부조경이었다. 3층 베란다 창가까지 치고 올라온 산수유나무 가지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친근하게 다가왔다. 저편 너머에는 이미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단풍나무 소나무 층층나무 벚나무 목백일홍 살구나무 등 키 큰 나무가 듬성듬성, 그 아래로는 눈에 익숙한 작은 키 나무들로 빼곡하게 둘러져 있었다. 방마다 배치된 전면유리창에 투영된 햇살이 우려낸 초록들로 우리 집은 은닉된 숲처럼 비춰졌다. 전원에서 살았을 때의 풍광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내 마지막처소로서 이만하면 괜찮은 곳이라 여겼다.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시사철의 변화를 가감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기대도 했었다. 


  몇 해를 고비로 아름다웠던 정원이 그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관리사무소에서 3년을 주기로 가지치기작업을 진행해 오기 때문이다. 아니 가로수의 가지치기 작업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파트에 식재된 나무들에게까지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소나무를 제외한 나무들의 수고(樹高)는 형편없이 낮아졌다. 3층의 위치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로 잘 자란 나무들이 이젠 그 아래로 굽어다 볼 정도로 낮아진 것이다. 그 이후로 조금씩 자라나고 있지만 자연스런 나무의 자태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강전지로 잘라나간 부분에서 가느다란 새 줄기가 촘촘하게 뻗어나 살려고 버둥대는 모습이 가히 기형적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무에도 품격이 있는 법. 가지치기에 대해 식견을 달리한 나는, 가는 가지도 아닌 굵은 줄기를 몽땅 자른 결과에 야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뭉뚝 잘린 나무를 쳐다보는 내내 언짢았고 괴로움에 진저리를 쳤다. 뉴질랜드에서는 나무를 자를 때 주민들의 동의를 거쳐야하는 조례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네 형편과 대비돼 부러움을 샀다. 물론 아파트 내 나무관리매뉴얼에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거치는 수렴과정이 있으나 형식일 뿐 약식 처리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주민들조차 나무에 대한 관심이 적은 탓에 나무쯤이야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괜찮다는 무관심과 몰지각이 불러온 결과다. 게다가 잦은 이사로 이동이 잦은 아파트의 특성상, 주민의식이 제대로 정착될 리 없는 빌미를 관리자에게 제공한 격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 뿐이 아니다. 그 작업에 얹혀 사단을 키운 사건이 또 있었다. 4년 전 아파트 대표회의를 거쳐 선정된 꽃가꾸기사업에서 발단되었다. 누군들 예쁜 꽃을 가까이하고픈 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고층의 그늘진 아래서 제대로 자랄 화초가 얼마나 될까. 화초 키울 욕심이 앞서다 보니 꽃에 그늘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공공재 나뭇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훼손시키는 아파트 동대표가 탄생되었다. 그 노인은 꽃 가꾸는 취미를 아파트 정원 속에 실현하고픈 마음이 커 자칭 나무전문가라 했으나, 그런 몰지각한 행태의 전문가가 과연 있을까. 그리고 그의 손에 심겨진 화초들의 식생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햇빛을 덜 받아 웃자란 줄기를 지지해줄 쇠꼬챙이가 덤으로 필요해졌고, 그로인해 심겨진 꽃이 예뻐 보이기전에 그 주변부터 지저분히 널려있다.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남길수록 공기 중의 탄소의 흡입량이 높아지고 녹음을 제공해주는 등 우리에게 나눠주는 자산 가치는 매우 크다. 한여름 나무그늘이 주변의 온도 보다 2도 이상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 정해진 자리에서 불평 없이 뿌리를 꿋꿋이 내린 채 나무들은 그들만의 몫을 재생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그들의 말 없음 속을 걷다 보면 생각의 말로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이 싱거워진다... 아는 꽃나무 하나가 모처럼 말문을 연다. 꽃 하나 뜯길 땐 욕을 내뱉었어요. 가지째 꺾일 땐 침묵을 배웠지요’ (황동규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름드리나무 앞에 서면 ‘큰 어른’ 못지않은 품격으로 다가와 경외감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나무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관리자 편리중심의 견해에서 벌어진 이 일을 어찌하나. 나무관리는 햇빛을 향한 굶주림의 나무가 없게 골고루 자라게 해주는 숲 관리차원에서 비롯됨을 상기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근래 들어 거론되는 ‘도시숲 관련 조례’ 소식이 눈에 띄게 반갑다. 새롭게 조례제정을 할 때 가로수 외에도 아파트에 식재된 나무까지 공공재로 인식하고 관리하도록 지자체가 나서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그래서 절절하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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