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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un 16. 2023

끝나지 않은 참화, 그 현장을 돌아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다뉴브 강이 있다. 몇 해 전 모 TV프로그램을 통해 투영된 부다페스트 야경은 황홀했다. 수 백 년 간 유지해왔던 아름다운 그들의 석조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슬픈 사연이 담긴 ‘다뉴브 강의 신발들’이 카메라 앵글에 클로즈업되며 일순간 멎었다. 신발을 벗은 유태인들이 다뉴브 강가에서 일렬로 총살을 당한 곳이란 구슬픈 내레이션이 흘렀다. 1944년 헝가리나치정당의 학살로 인해 그 나라를 이끈 주역의 반 이상이 희생됐다고 하니. 헝가리가 겪은 수난의 역사는 우리 참담한 역사와 매우 닮았다. 


  현충일을 앞두고, 구례에 머물면서 다뉴브 강의 학살현장이 떠올랐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지리산을 향해 끓어오르는 마음이 최대치이었을 무렵, 모 재단에서 주선한 ‘여순항쟁’ 역사기행 1박 2일의 자리에서였다. 그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에 우뚝 서보았다. 학교운동장이 손쉬운 접할 학살 현장이자 공동묘지가 되었다니. 그렇게 어이없게 죽은 영혼들과 ‘간문초교’와 ‘원촌초교’운동장 너른 공간에서 조우했다. ‘역사’란 사건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전개되어온 ‘결과’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달렸으며, 그 전 과정이 연계돼 설명되어야 함을 배운 장소였다. 즉 역사적 사실(事實)은 팩트가 아닌 사료로서 규명된 사실(史實)이어야 한다는 점도 숙지하게 되었다. 


  세종시 연기면에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발굴기사는 2018년에 나왔다. 그때 무더기를 이룬 양민들의 검정고무신 사진이 ‘다뉴브 강의 신발’ 이미지와 겹쳐지며 숨을 멎게 했다. 1950년 우익 관변단체인 보도연맹에서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양민대학살 사건의 흔적이었다. 보도연맹에 억울하게 연루돼 숨죽이고 살아온 자손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들이 겪었던 어마 무시한 얘기를 아무런 연관 없는 타자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쉬쉬 숨죽여가며 가족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한 존재로 살아갔다. 연좌제에 묶여 사회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한 후손은 결국 인권운동가로 나섰다. 6•25가 발발한 1950년, 나는 겨우 세 살이었다. 서울이 아닌 그곳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나도 세상에 없을 목숨일지 모른다. 단지 부역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젖먹이 애든 부녀자이든 가리지 않고 저지른 보복의 굿판이 한바탕 휘몰아쳐 갔으니까. 같은 종족끼리 혹은 마을사람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반복의 참상이라니.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비화다. 


  비록 노구의 몸이지만 역사공부에 임할 때마다 내 눈은 초롱초롱 빛난다. 그러면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부쩍 커졌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가봐야 여행 장소를 손꼽는데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의미 있는 현장을 돌아보기로 했다. 역사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속한 사람들과 인간의 실존적 조건 때문에 그 시대상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제약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 살아생전에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에 있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에 공감하면서. 이제 내 여생이 허락한다면 짬짬이 이런 행보로서 참담했던 그 후손들의 손을 잡고 기억하는 시간으로 갖고 싶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으므로. 


  릴레이로 이어질 다음 장소는 광주 망월동5•18묘역이다. 광주항쟁의 배경이 된 영화, ‘1987’을 재방을 통해 다시 보았다. 악명 높은 대공수사처 박차장은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에게 교도관의 강압적 수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좌익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자신의 부모를 두 눈으로 똑똑하게 기억하노라고. 그래서 철천지원수인 빨갱이 도발에 나섰다고... 내 귀에 박힌 빨갱이란 말이 내내 거슬렸다. 

  혼란기 1987년, 시청 앞 광장에서 빗발치는 최루탄 함성에서 나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정부통제하의 독점 언론보도에 속아 안온함에 젖어있었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화한다.’는 고 노무현대통령의 어록처럼 어느 역사의 진실이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짐작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그들의 진상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부끄러웠다. 황폐된 삶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고,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을 얻어 고생만하다가 죽음으로 산화한 의인들. 마음이 울컥했다. 역사의 총책인 독재자 전두환은 사과의 말 한 마디 없이 숨을 거두었다. 섣부른 짐작조차하기 어려운 통한의 시간이 채 끝나지 않아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는데. 그런 그가 멀쩡하게 살다가 자연사했다.  


  우린 왜 해방이후 이념의 틀에 갇혀 사회갈등을 조장시키는가. 다양성이 요구되는 이 시대인 만큼 이를 뛰어넘어 국민화합으로 이끌어 낼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없는 걸까. 분단된 나라의 유일성 때문에 세계정세 상 특수상황에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 가까운 친지조차 서로 만나 얼굴을 붉히는 경우로 번져갔다. 나는 저편의 입장을 듣는 편이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거부했다. 이유인즉 우리 편에서 유리하게 조작된 얘기일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떠도는 소문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직접 경험해서 알아낸 결과만 신뢰한다. 반면 내 주변사람들의 대다수는 떠도는 잘못된 정보에 의지해 그것이 사실인양 따르는 이가 의외로 많다. 특히 역사문제는 위정자의 입지에서 잘못 기록된 일이 적지 않은데 이조차 모르는 이가 적지 않다. 어떻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는 걸까. 잘 모르는 일은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면 될 것을, 얻어진 작은 정보의 파편만으로 아는 척 하는 것이 문제다. ‘위험사회’의 저자, 올리히 벡은 이 같은 한국사회를 아주 특별한 위험사회라 말했는지 모르겠다. 좌파•우파 이념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지정학적 요인에 갇혀 갈등의 양산을 부추기는 우리사회에 드리워진 그늘을 그는 에누리 없이 바라봤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몸살을 하느라 나와의 약속기일을 넘겼다.(현충일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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