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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May 31. 2023

오월에 꺼내든 아버지의 초상

  중학교 졸업 이틀 후, 아버지가 타개했다. 병환 중이었으나 예견된 죽음은 아니었다. 입원중인 아버지의 병수발을 지키던 어머니에게 막내인 내 졸업식에 참석하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있었다. 이내 바통을 이어 받은 언니의 서툰 돌봄에서 파생된 일이었다. 그 돌발 상황에도 이상하리만치 나는 침착했다. 슬픔과 연루된 어떤 감정나부랭이도 일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곁에 남아있다는 든든함이 부각된 점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부고로 아버지와 얽혀있던 단서 하나를 풀 기회가 없어지며 서늘해진 내 감성의 탓이리라. 그랬던 일이 나이 들고 나서 엉킨 실타래 풀리듯 저절로 풀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향한 특별함이 도드라져 재조명된 계기였음을 고백하련다.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어린 우리들의 배를 만족할 정도로 채워줬고 철마다 갈아입을 옷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정서가 안정된 시절을 보냈다. 자식들 모두 균등하게 고등학교까지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았음도 물론이다. 하지만 그 시절 대다수의 부모들이 그리 살았듯이 우리 아버지도 학교문턱을 넘지 못했다. 겨우 눈 동량으로 한글과 숫자를 익힌 정도에 그쳤으니. 지닌 것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타고난 손재주와 끈기 그리고 정직함으로 올곧게 살아 본인 방식대로 자수성가를 이뤘다. 소년가장으로 출발해서 나름 입신양명한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었을 때, 내 양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2층 신식구조의 빨간 벽돌집에 살았다. 손재주가 남다른 아버지는 아래 1층 가게에‘개풍공업사’란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한국에 파견 나온 미국인의 전용 생필품도록만 보고서도 따라 만드는 기술을 본 선교사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척 보고 따라하는 아버지의 눈썰미에 놀라 선교사들이 연신 “미스터 정, 넘버원”을 남발했다. 당시 우리에겐 낯설기만 한 오븐과 서양식난로였다. 나는 이것을 제품이 아닌 ‘아버지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선교사들 전용 카탈로그에 당당히 올랐을 때, 나는 어깨를 으쓱댔다. 한 번은 아버지 작업장에 내려가 놀라운 물건을 목격했는데, 앙증맞은 미니어처 한옥 한 채가 작업장 위에 턱 놓여있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ㄱ자 모양을 한 기와집 모양에 아궁이 형상을 꾸린 부엌까지 만들어 낸 아버지의 걸작이었다. 귀국을 앞둔 선교사에게 건넬 선물이라고 뒤늦게 들었다. 


  찬사일색의 아버지는 이쯤에서 그치고, 이제부터 아버지의 결핍을 노출하고자 한다. 스승인 아버지의 손길만큼 따르지 못해 버거워하는 제자들을 포용하고 감싸주기는커녕, 책망과 질책이 그 뒤를 따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잘난 인물이었기에 그렇지 못한 제자들이 성에 차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의 무덕함으로 주위에 남아날 제자가 있겠는가. 그나마 이런 상황을 지나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보듬어준 역할은 어머니의 몫이었지만, 아랫사람에 대한 통솔지도력 결핍은 결국 아버지에게 커다란 약점이 되고 말았다. 

  술에 약했지만 하얀 피부를 지닌 미남형의 아버지는 기생집을 드나들며 인기 있는 손님으로 꼽혔다. 남성들의 외도가 너그럽던 세태를 타고 아버지의 행보는 스스럼이 없었다.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지금은 사라졌지만 종로 한복판에 유명한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앞세운 채 포목 매장에 들러 마음에 드는 옷감을 고르라고 말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몇 가지를 골랐더니 이젠 어머니에게 홀로 집으로 돌아가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물건을 챙겨 먼저 사라지더란다. 뒤늦게 알고 보니 구입한 모본단과 코르덴은 어느 기생의 옷감이 되었고, 얼마 후 어머니의 들러리 노릇도 부족했던지 그 기생을 집으로 성큼 데려와 잠을 재웠다는 것이다. 그런 비정한 아버지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판단에서 아버지 앞에 굵은 선을 둘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유자적 외도를 서슴지 않던 아버지는 더 나아가 어머니의 존재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금강산이며 개성 등 여러 곳을 돌며 여행을 즐겼다. 


  아들선호사상이 골이 깊던 시대, 줄줄이 딸만 낳은 우리 집. 7번째 막내인 나는 제대로 기를 피지 못하고 자랐다. 또 딸이라서 뭔지 모를 미안한 생각에 갇혔고 아버지 앞에 서면 작아지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어머니에게만 철썩 붙어 다녔다. 그러느라 아버지와 말을 섞는 일이 적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전용공간은 아래층 작업장의 구석진 작은 방이었는데, 우리는 2층의 살림공간에서 1층 아버지와의 동떨어진 거리에서 생활했다. 끝내 생활공간 내 합방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와 가족 간 공유의 시간대는 식사할 때와 라디오 연속극을 귀담을 때였다. 그 당시 고작 통신기구 라디오 한 대를 지닌 것만으로도 문화생활을 향유했다고 자부했던 시절이다. 참으로 박물관에나 걸릴법한 태곳적 얘기를 지금 늘어놓고 있다. 아버지 전용공간에 모여 귀를 쫑긋이 모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에 흠뻑 빠져 웃고 떠들며 때론 슬픈 감정을 서로 쏟아낸 시간들로 장식됐다. 내 유년기부터 우리가족은 그 같은 이중구조의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짐작한다. 아버지 환갑에 내 나이 겨우 열 살이었으니, 이미 나이든 부모가 일찍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와의 핑크빛 기간도 거쳤는데, 중학교 학창시절을 통틀어 3년여의 기간이 전부였다. 공부를 잘한 나를 뒤늦게 예뻐해 주신 그 짧은 시간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이것이 나이든 부모 아래 막내가 겪어야 하는 설움이다. 


  중절모를 걸친 중년시절의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지팡이를 걸친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멋진 폼이 났다. 그런 사진 속 아버지로부터 결핍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 건, 아버지 사후 50여 년을 훌쩍 넘긴, 내 나이 초로에 들 무렵이었다. 한량 아닌 한량처럼 누리며 산 아버지는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멍울을 그런 행적으로 보상받고 싶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결핍과 허전함을 메워줄 행로가 그때 이미 예견된 일과인 것처럼. 죽음 직전까지 홀로 가족을 돌보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한 가장이었다. 소년시절부터 맨몸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나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얼마나 쉬고 싶었을 건가. 아버지 삶의 여정에서 쉼표가 와 닿을 때가 그때였을까. 단지 그 쉼의 형태가 고루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아버지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를 이어갈 의지할만한 아들 없이 노후를 맞는다는 건 당시의 아버지에게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끝이 보이지 않은 질곡의 생애에서 맞닥뜨리며 얼마나 마음이 시렸을지 가늠할 수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안정적인 재정으로 가계가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한 아버지였다. 

  고단한 아버지 삶의 전 생애를 거치며 막내딸에게 애써 관심을 베푼다는 것이 빡빡한 삶인데다 표현이 서툴기로 녹록치 않았으리라, 그런 무게에 눌려 무심히 넘긴 것뿐이다. 자식 사랑하는 아버지의 표현을 아버지의 언어로 인지해 막상 받아들이고 나니 어릴 적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여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 품었던 오해를, 살아생전에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에 털어놓는 바이다.  


  ‘가는 세월’노래로 널리 알려진 서유석의 노래, ‘너희는 늙어봤냐, 우리는 젊어봤다’는 늙은 우리네 웃픈 현실을 대변해주는 노랫말이다. 이리 늙어서야 그때 노부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되다니. 장성한 후 보답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 글을 아버지에게 바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균형을 이룬 아버지의 보살핌이 정서적 안정의 내 삶에 근간을 이루었다. 덧붙여 바르게 살아온 아버지의 본보기를 내리받은 이 행운 또한 지금은 떳떳하게 살아가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정의 달 오월의 마지막 날, 아버지의 초상을 꺼내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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