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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May 14. 2023

내 인생의 마지막 열정

  내게 머물러 줄 짱짱한 날들이 이제 얼마 남았을까요. 60대와는 사뭇 다른 70대 중반의 느낌이 머리에 얹혔습니다. 녹슬어가는 몸뚱이에서 내보내는 신호가 남달랐던 거죠. 흐르는 촌각들이 빠르게 펼쳐졌다 오므라듭니다. 숨결이 흩어지기 전에 하고픈 일들로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이로써 남겨진 시간들은 절박함을 고조시켰습니다. 마치 시한부 삶을 선고받아, 주어진 시간에 실천할 일들의 순번을 매기는 작업처럼 요. 그런데요 이같이 좁혀진 시간들이 되레 환희와 희망에 차 충만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겠어요. 남겨진 날들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내밀한 시간들을 관찰하고 있고 한 편으로는 노년에 따른 운신의 폭을 넓혀줄 인문학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늙은이가 내딛는 광폭(?)에 훼방꾼이 전혀 없고, 직접 재단할 ‘나 홀로 시간’의 분량이 쌓여가 부자 된 기분입니다. 


  대체로 은퇴 후에 걸려오는 지인의 전화횟수가 줄기 마련입니다. 요즘은 전화를 걸기보다 문자로 주고받는 게 대세인데 그마저도 노년에는 사그라집니다. 일선에서 물러선 이유가 크겠습니다만 일상에서조차 관심 밖으로 내몰리는 거죠. 나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시간을 다툴 일로부터 해방된 노년에, 이로써 안긴 시간대 속으로 심연 깊이 질주할, 오히려 좋은 기회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원해져가는 관계가 노년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일까요. 요즘사람들은 과도하게 디지털문화에 빠져있어 정작 소통이 요구되는 원래의 화법에서 매우 후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계의 단절로 진정한 대화가 실종되고 서로가 고독해지는 거죠,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지식과 언어에 의지해 다양한 표현을 구사할 능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사회에서 돌아다니는 언어가 이미 획일화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디지털의 편리성에 빠져들면서 더욱 인터넷시장에만 눈을 돌리다보니 사유할 시간을 빼앗긴 요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저도 주위사람들 관계망의 흐름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지요. 공허하고 씁쓸했습니다. 그러다 이러려면 차라리 쓸쓸하겠지만 고독한 시간으로 나를 몰아가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공법으로 나선 것이지요. 그때의 상황을 역으로 몰아 ‘공부하는 삶’의 방향으로 꿰찰 수 있었던 겁니다. 생각의 반전이었죠. ‘고독’하지만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와 함께 나를 정조준 한 나날의 결과였으니까요.


  지향하는 내 목표는 늘 깨어 실천해가는 삶입니다. 노년에 굳어지는 뇌의 활동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고령에 공부하는 삶이 활력소가 되어준다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주1회 정기적으로 나가는 인문학강좌를 듣습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는 다양한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데, 인문학을 좋아하는 비슷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서로에게 영향력을 나누며 친구가 되기도 하고요. 주고받는 자극에 선의의 경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강좌를 계기로 가지를 치더니 여럿 줌 강의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영역에도 그렇듯이, 인문학조차도 추구하는 트렌드에 따라 조명을 받기도하고 잊히기도 합니다. 이 강의 장에서 나는 번뜩이는 거인, 전봉준 장군을 새로운 시각으로 만났습니다. 책, ‘전봉준 혁명의 기록’을 읽어가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혁명은 비록 실패했으나 민중의 동력을 동원해 우리역사 최초로 전국 규모의 봉기를 이끌어냈다는 점. 그리고 현대 민주화운동에서 상징적으로 추앙받는 지도자로 부상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장군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일찍이 개화된 세상으로 열렸을 테고 민주주의를 앞당긴 나라로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라 하면 언뜻 서양에서 발단된 것으로 알지만 우리 농민의 원천사상인 동학혁명이 그 자생적인 뿌리였음에 놀라울 뿐입니다. 상당히 고무되었고 자긍심도 생겼습니다. 정부는 올해, 동학농민이 대승을 거두었던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의 날’로 지정했는데, 뒤늦었지만 잘된 일입니다. 


  지금의 ‘독박’경험은 오히려 ‘대박’의 기회임을 그 시간대를 거치면서 알게 됐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비로소 혼자인 자신에게 성실해질 수 있는 법이라고요. ‘괜찮은 혼자’가 ‘만족하는 혼자’ 그리고 ‘성숙하는 혼자’로서 거듭남을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무의미한 세상의 소음과 잡음에서 멀리 벗어났을 때만 위대한 사유에 이르게 됨을, 위대한 사상가의 흔적을 통해 우린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이럴 즈음 오히려 개개인의 마음에 근육을 단련시킬 좋은 기회로 삼는 일입니다. 이런 나는 단지 ‘고독’한 처지를 빗대 우울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문학 강좌에서나 감명 깊은 책을 만날 때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의 존재’들을 발견하며 안도합니다. 그들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으로 발동하기도 하고 때론 잘 살고 있다며 다독여줍니다. 그러니 내 혈연에 기대려거나 호모사피엔스 등장 이래 어떤 존재에도 고정되어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필연코 물리적인 어떤 존재만이 내게 든든한 이웃이 될 수 없음을 나이 들어 더 각인시켜 주었으니 말입니다. 


  하루하루 알맞은 내 일정을 소화시키며 살고 있습니다. 내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부을 영역을 찾았으니 소박한 행복에 젖습니다. 하고픈 대로 노년의 정 중앙을 건너고 있어요. 그러면서 정신을 헛되이 사로잡는 스마트폰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인다든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채울지 모를 가벼운 외출을 삼가며, 공부에 치명적인 지장을 주는 어떤 사교의 장에도 최대한 멀리 합니다. 그렇다고 고립돼 사는 건 아닙니다. 설령 물리적으로 고립되더라도 정신 안에서 참된 관계를 유지해주는 모임에는 보다 적극적입니다. 지나친 고독은 자신을 피폐하게 할 수 있어 균형에 맞는 세상과는 맞닿아 있어야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계획과 실현가능한 주제로 꾸준하게 담금질할 영역을 지녀야 함은 노년에도 필연적이라 봅니다. 이렇듯 나는 노년에 머물러 자칫 ‘무기력해질 고독’에서 ‘생산적인 고독’으로 몸소 갈아타고 있는 중입니다. 비로소 이곳이 내 마지막 열정을 태울 의지처로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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