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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Sep 03. 2023

진짜 공부는 따로 있다

  위기에 봉착한 학교 안팎의 교권을 바라보기 참 민망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 참혹상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의 작태와 담임교사에게 함부로 구는 아동에 이르기까지 교권침해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연배 든 나로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우리들의 ‘선생님’은 범접하기 어려웠던 초상 그 자체였으니까요. 이쯤에서 교사들에게 내몰린 학내 어려움의 한 측면이 아래와 같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과한 열망이 2022년도 기준 대학진학률을 73%대로 끌어올렸어요. 1960년대 사회상과 대비해 치솟는 교육열은 좀처럼 식을 줄 모릅니다. 이 같은 과열현상은 배움에 대한 단순한 열정이기 이전에, 역설적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극혐 수치(數値)로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고등교육 거친 성인들이 이젠 학부모가 되었어요. ‘선생님’에 맞먹는 아니 우월한 교육을 받아 교사의 고유한 영역에 위해를 가하는데 서슴지 않은 일부 학부모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 보다 열등한 교직을 하대하려 들고 내 아이의 성적에만 관심을 둬 교사를 교내 가정교사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옛적 존경의 대상이던 선생님의 위상이 무너진 일은 이런 현상과 무관치 않을 겁니다. 그런가하면 소수의 자녀를 둔 학부모의 사회적 요인도 그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다자녀시대에서는 선생님을 향한 학부모들의 신뢰가 확고했습니다. 핵가족이 진행되면서 둘도 없는 내 자식이 배움터에서 혹여 배제될까 하는 우려에서 저지른 학부모의 지나친 관여가 사건 배후에 도사렸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럴 법한 학부모의 입장을 모를 바 아니나, 삐뚤어진 일부 학부모의 인식을 이 시점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교권 추락이 진행되면서 교사들 대다수가 교직 선택을 후회하고 있으며 향후 교직지망생도 점차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이 점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사후 벌어질 내 아이의 교육 여건이 어찌 돌아갈지 불 보듯 빤하겠지요.  


  우리교육 과열의 한 단면이 그늘로 드리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산업 발전에 기여한 인적자본을 배출하였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식산업시대로 진입하면서 지식은 더 전문•세분화 되어가는 추세죠. 사회 인재 발굴에서 이른바 엘리트계층을 탄생시킵니다. ‘개천에서 용 난 사람들’은 고리짝 옛말이고 이젠 그 자리를 경제적으로 윤택한, 선택받은 운 좋은 사람들로 메워지는 연혁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들은 높은 위치에 오르며 엘리트 지도세력을 키웠죠. 엘리트계층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지만. 바른 인성과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공부만 잘한 결과물로 올라탄 엘리트 계층의 사다리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들은 잘 났기에 안하무인 뻐기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계층의 일부 의식이 이 사회에서 다층적으로 극명하게 교차되며 지배구조를 이룬다는 점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이젠 배움에 있어 바른 기회균등이라면 모를까 오직 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웅크려진 욕망은 단연코 거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왕의 디엔에이(DNA)로 태어난 자식’임을 앞세운 학부모까지 등장했어요. 교사를 겁박한 것과 다름없어 그 사건의 실마리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이 들면서 삶의 이치에 적중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보니 진짜 공부란 벼랑 끝 최악의 수를 만나더라도 즉각 대응할 생존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지역생태계에서 친화적 삶을 배워 익힌 올곧고도 일관적인 자생의 힘으로 말입니다. 극한상황에서 살아남는 생존기, TV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어요. 지구환경이 기우는 위기를 포함해서, 태어난 누구라도 다가올 어려움을 피할 수 없지요. 학업 후 사회일선에서 맞닥뜨릴 자기이해의 출발과 타인과의 역량을 키우는 일 역시 교과과정의 배움만으로 배양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의 어긋난 욕망도 이를 가세한 일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좋은 학업성적과 별개로 시선이 머물지 않는 비인기분야에 일찍 눈을 떠 독보적인 결과를 확보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 학내공부에 사활을 걸고서도 훗날 사회적응에 이르지 못해 자기 안에 갇혀 지내거나 독불장군처럼 사는 이도 있어요. 이렇게 예측불허의 접촉면이 넓어진 성인세계에 이르러 학업에만 매달린 학창시절의 삶의 기획이 휴지장이 되어버리는, 준비된 상상과 대비될 수 없는 현실이 밀려옴을 기억하세요. 이번 교내 비극의 발단 또한 이 같은 허구를 추구하는 사회상과 무관치 않습니다.


  이로써 억울한 죽음에 이른 교사를 기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치중해 온 진학수업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내 아이 앞날에 더 중요한 공부가 무엇일지 곰곰이 숙고하는 학부모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아이는 내 뱃속을 통해 태어났지만 내 소유의 아이가 아닌 별개의 독립인격체란 점도 상기하시고요.


* 9월 4일, 서초교 교사의 죽음을 기리는 ‘49재의 날’을 하루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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