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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Aug 21. 2023

나는 유연한 채식주의자

  이어지는 혹서에도 달가운 소식이 있다. 긴 장마에 천정부지로 오른 채소 값이 진정세에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해 턱없이 오른 물가를 실감하지만 쨍쨍한 햇볕아래서 자라 영근 제철 채소를 덜 부담스런 가격으로 먹을 수 있게 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그나마 채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축에 들었기에 말이다. 이런 요즘 내 밥상은 오방색을 띤 채소 퍼레이드로 자못 화려하다. 식탁 위 메인 자리에 오른 각종 채소들은 알록달록한 색감만으로 침샘을 유발시킨다. 차려진 다음 찬은 두부와 된장찌개 그리고 버섯류다. 두부는 육식 못지않은 단백질원이라 자주 챙겨먹는 편이다. 동물성 단백질에 완벽하게 세뇌된 친지들은 육류의 전멸 밥상으로 몸을 축낼 것이라며 아우성 댄다. 심지어 고기 장조림을 장만해오는가 하면 고기반찬을 택배로 부치는 살가운 이도 있다. 그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지만 직접 육류를 구입한 적은 거의 없다. 평소 멀리했던 육식이었지만 채식주의자로 이끈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다. 


  2017년에 상영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의 기억을 끌어냈다. 주인공인 소녀와는 무촌과 같은 가족 감성의 돼지, ‘옥자’는 청정지역에서 튼튼하고 엄청난 슈퍼돼지로 자라났다. ‘옥자’는 그 상품성을 인정받아 뉴욕의 한 공장형 축산업계로 조용히 팔려갔다. 뒤늦게 알게 된 어린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파란만장 우여곡절 끝에 ‘옥자’를 다시 집으로 구해 왔다는 줄거리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직접 뉴욕의 한 도살장에 머물며 구역질나는 온갖 동물들의 냄새를 체험했다. 이후 봉감독도 채식위주의 생활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인간의 욕망에 재물이 된 동물들은 갖은 영양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항생제로 범벅이 되어 생명체 아닌 상품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밀집 축산의 그늘 아래 양산된 생명들이 대부분 우리 밥상에 오른다. 한 달여 목숨에 그친 병아리, 6개월 정도 살다가 죽음을 당하는 돼지와 소가 거기에 있었다. 우린 그런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보신에 혈안이다. 동물은 한낱 먹을거리 대상이니까. 이런 인간중심의 사상은 서양문화와 자본주의가 만나며 최고조를 이뤘다. 도살장의 비위생과 혐오스런 기구가 난무하는 현장 그리고 죽어가는 생명들의 비명을 우리가 목격했더라면 과연 그 사체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까.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육류의 대부분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입으로 들어오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알리라. 나는 모 치킨업체 광고화면에서 배우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아짝 소리를 들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건 굶주린 하이에나 표정의 각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렇다고 ‘하이에나’를 지칭해 동물을 비하하려는 말이 아님을 새겨들었으면 한다. 동물은 배고플 때 먹이를 구하는 데에 반해 인간처럼 장난과 재미삼아 배 터지게 먹어치우지 않는다. 과잉영양에 살찐 몸을 뺀다고 애꿎은 비용을 쏟아내는 아이러니라니. 오로지 인간을 위해 태어난 생명은 이 세상에 없다, 생명들을 오직 먹이 대상으로만 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이 지구의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이 내 목전에서 육류꺼리로 추락해 죽음당할 일은 없기로 했다. 젊어서 즐겨먹던 회도 끊은 지 오래다. 돼지와 소가 도살장에 끌려왔을 때 죽음을 직감하고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도마 위의 횟감용 활어 역시 울음소리를 낸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아무리 맛깔스런 것이라 해도 횟감이 되기 이전 팔딱였던 활어의 모습을 모른 채하며 목구멍으로 넘길 자신이 그래서 나는 없다. 

  우린 먹을거리가 지천인 세상에 살고 있다. 옛 임금님 밥상 못지않은 식단을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육식대체 식품을 식물에서 구해도 될 진데. 채식위주로 섭생한다는 건 생명들과의 공생관계로서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며,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지름길이기도 해 더욱 그렇다. 이 일에 고양돼 채식을 더 넓혀가기로 한 계기가 되었다. 채식식단은 소화가 잘 돼 몸이 가벼워지고 살림비용 또한 절감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따른다.  


  지금 나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비건)’는 아니며 계란과 해산물 정도를 섭취하는 유연한 채식주의에 머물러 있다. 우유 대신 두유를 섭취하며 버터도 식물성으로 대체해 사용하고 있다.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비건’의 사회적 환경 상 전문음식점을 찾기에 불편함이 있는데. 동참한 모임에서조차 별도의 주문을 따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육식의 욕망을 누르고 채식위주의 선한 섭식을 선호하기 쉽지 않은 우리의 환경이다. 그럼에도 ‘비건’들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라니 우선 반갑다. 고등학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소리 소문 없이 자리 잡아간다는 소식이다. 이런 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각기 다양할진데 가상하기 이를 때 없다. 무자비하게 학살되는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하면서까지 평등 • 인권을 내세우는 모순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고귀한 실천에 나선 그들이 아닐까 싶다. 이에 편승해 ‘비건’ 전용식당이 눈에 띄게 생겨났으면 좋겠고 전용 식품과 베이커리 코너도 많았으며 좋겠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비건’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날 테니까.

  약자인 동물에게 연민으로 무장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자신의 건강에 이롭게 작용함을 실천으로 느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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