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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Aug 13. 2023

여러분의 안녕이 궁금합니다

  모임에서 듣게 되는 “건강하시죠.”란 첫 마디는 늘 천편일률적이다.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내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인데. 늙은이에게 건넨 덕담이겠지만 판박이인사말로 들리니 이를 어쩌랴. 얼굴 상태를 살펴보면 가늠이 가능할 텐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건네와 실망스럽다. 살아갈 날 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 노인이라서 궁금한 일조차 없는 차별화된 별종 취급이 아닐까 싶다.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세대로 나뉜 언어의 장벽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노인도 노인 나름, 젊은 사람 못지않게 짜인 스케줄이 있고 맡은 바 소임에도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 비록 그 일이 사회와 직접 연결 짓지 않아 개인 범주에 머물지라도 나눌 화제꺼리로서의 존재감은 건강하게 살아있다.


  사람들 다수는 몸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몸에 좋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구하려고 혈안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 과다섭취도 모자라 과잉영양이 겹치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일임을 그들 또한 모를 까닭이 없다. 다만 알맞은 섭식에는 관심이 없고, 무병장수로 잇고 싶은 탐욕을 내려놓지 못해서다. 내가 바라보는 건강유지의 관점은 ‘실천 가능한 선행과 작지만 충만한 일과’로서 그날그날 잘 살아내는 ‘마음의 건강’이 몸 건강 보다 앞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파트 내 길고양이를 향한 선행의 출발선이 지금의 건강을 받쳐준 일임을 나는 의심치 않으니까. 그 외, 내가 선택한 여럿 일과를 그때그때 이행한 일도 마음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압도적인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마치 쌓여가던 선한 이치의 마일리지가 어느새 목전의 보상으로 보장받는 것만 같았다.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에서 초미세 질량에 불과한 먼지와 같은 우리 존재라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고 있다. 남과의 경쟁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색깔을 꾸준히 연마하노라면 어디서라도 그 존재감은 지켜낼 수 있지않을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신조어는 ‘카•페•인 우울증’이란 말을 들었다. 언뜻 들으면 커피 카페인을 연상하게 되는데, 카카오스토리 • 페이스북 • 인스타그램의 앞 글자만 따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성공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부러워 자신의 삶과 비교하며 불행을 키워 밀려온 우울감이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직면한 현실은 불행하고 미래는 더 암담하다. 탐욕으로 탄탄히 누려온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말인들 건넬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자칫 화려하게 비치는 상대의 한쪽 면만 바라보고 판단하는 누를 범하지 않기를. 성공의 잣대는 천차만별이고 누구나 열릴 기회가 있으니, 그걸 잘 포착하기를. 그리고 성공의 꼭짓점은 한 때에 머무는 찰나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영원하지도 않다. 오히려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남모르게 치러야 할 고통과 내리막길의 뒷면까지 바라봐야 하지않을까. 그러니 그 성공의 꼭짓점이 전부라 판단하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를.     

  부디 인생의 목표를 크게 잡지 않기를 바란다. 태어나면서 인생에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경험한 요줌 세대들이 아닌가. 그러니 처음부터 과도한 짐을 짊어지기보다 작은 짐으로 바꿔 새 출발하기를. 오히려 작은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건강유지의 비법임을 더 기억해주시라.  


  내 하루의 일과는 생명들 돌봄으로 시작된다. 새벽에 일어나 맨 처음 길고양이 사료와 물을 챙기고 밖을 나선다. 냥이들의 배고픔을 해소해 주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우리 아파트의 면적이 제법 커서 고양이 급식소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짭짤한 운동득템의 효과도 있다. 곁들여 새들의 목마름까지 챙겨주는데. 도시에서 목추길 만한 깨끗한 물을 찾기 어렵고, 한여름 뙤약볕에서의 갈증을 어떻게 견뎌낼까. 언젠가 포장도로 위의 웅덩이진 구정물에서 주둥이를 처박고 목추기는 비둘기들을 본 적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흡연자들의 피고 버린 담배꽁초가 둥둥 떠 있어 마음이 짠했다. 우리의 생명 유지에 정갈한 생명수가 필요하듯, 날짐승들도 예외일 수 없다. 내 정성이 담긴 큼지막한 물그릇 위에 날아온 새들이 목추기고 자맥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전원생활로 돌아간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머잖아 새들에게 혹독한 겨울철이 다가올 때, 그들에게 제공할 곡물의 색감을 자연 위에 덧칠해 주었다. 전원생활을 정리하고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와 마주한 그 장면에서 내 작은 손길이나마 보듬어줘야겠다는 생각을 그렇게 펼치게 되었다.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강아지산책 도중에 맞닥뜨린 냥이들의 굶주림을 어찌 외면할까. 그러면서 고양이를 싫어하는 주민들의 냉대를 이겨내 살펴온 지 10년째. 그리고 돌봐왔던 고양이들의 세대도 여러 번 바뀌었다. 정든 냥이들 모습이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 고양이들이 도시에서 버틸 생명의 주기는 4년 전후로 짧지 않나 싶다. 특히 새끼가 성묘가 되기까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잦다. 거처할 곳 없이 노상에서 한여름의 폭염폭우와 한겨울의 혹한을 고스란히 겪어내는 그들에겐 생명유지가 절체절명 순간의 연속이다. 병에 걸리기 십상이고 차에 치어 죽거나 얼어 죽기도 한다. 10년 전 우연히 구성된 캣맘들의 모임은 나를 비롯해 5명이었다가 점차 줄어들더니 3년 전부터 나흘로가 되었다. 캣맘조차 빈번한 이주로 떠나가는 아파트 주민의 특성임을 어쩌랴. 언제까지 이 돌봄을 이어갈지 모르겠으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게 될 나를 만난 냥이들에겐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 생명들의 보살핌이 내 삶 속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어림할 수 있다. 그건 분명 자연주의적 삶의 실천일테니까.


  이 시점에서 글을 마무리하며, 여러분의 안녕이 어떤지 굳이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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