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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ul 30. 2023

‘절친’으로부터 홀가분해지기로 했다

  불확실시대에 ‘절친’이라 여길 분이 있으십니까. 생각의 코드가 맞고 가치관도 같아서 대화하기에 참 편안한 사람. 게다가 문화 정서로도 이어진다면 금상첨화겠죠. 특정 지어진 인물과의 관계에서는 그 상대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가 마음 바탕에 깔려있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간혹 어긋난 말을 듣더라도 그럴만한 배경이 따로 있으리란 생각을 일부러 내어 배려하려는 마음. 인품을 믿기에 그의 낯선 ‘말’에 바로 대응치 않고 자신의 뇌로 전달해 ‘숙성’시간을 거치라는 겁니다. 즉각 자신의 생각을 내지르기 전에 쏟아질 말의 결부터 잘 살펴보라는 의미인거죠. 그것이 ‘신뢰하는 자’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음은 명상 실전을 통해 알게 된 부분인데요. 몸 안의 기운을 드러낸 것이 소리를 타고 공기에 실려 상대방의 귀에 도달하기까지 전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소리는 개개인의 기운에 따라 맑거나 탁해지는가 하면, 말의 속도도 느리거나 빨라짐에 따라 말의 해석은 천차만별로 갈리기 쉽습니다. 그러니  본래의 뜻과 다르게 왜곡시킬 수 있는 말의 양면성에 나 자신도 모르게 발 딛게 될 날도 맞을 수 있음을 기억하세요.  


  20년 넘은 지인이 있습니다. ‘절친’이라 믿었습니다만 그 일이 있은 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동호인으로 만나 대화가 잘 통해 친동생 같은 감성으로 번져갔습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운 그녀지만 매사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어요. 경제 일선에 나서게 한 남편을 향한 원망의 눈빛도 없었습니다. 일터에서조차 주인 된 마음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마저 일었지요. 그런 그녀가 올해로 환갑을 맞았는데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는 처지이고요. 열악한 환경 아래서 최저임금에 준한 일을 합니다. 노동의 일선에서 그녀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못해 애틋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쉴 수 있는 날을 제키고 이어지는 다른 일감으로 채우기 급급한 그녀는 노동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는 점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처음으로 의아심을 갖게 됐어요. 편히 휴식을 취하면 되레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될 일이 두려워서 고질적인 일에 매달리는 그녀가 아닐까 하는 추측과 함께. 그녀의 노동시간은 길어졌고 잠깐 짬을 낸 시간 속에 간만의 의례적인 만남을 치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관계를 더욱 영글게 하는 복심을 북돋울 기회는 여의치 않을 뿐더러 어떤 힘도 실리기 어려웠음은 빤하죠. 대부분의 만남도 성글게 엮이는 과정에서 ‘절친’이란 착각을 만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되돌아보니 나 역시 그런 속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절친’의 감성을 대동하고 나간 자리에서였습니다, 그녀의 고된 일상 위에 자연스레 얹은 전파 속의 내 한 마디가 불씨로 화해 뜨겁게 달아오른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정도는 건넬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반격은 의외였죠. 당혹스러워서 그때 상황을 해명하고자 빠른 말로 질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순간 소스라쳤습니다. 상대가 ‘절친’이라면 적어도 이런저런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구차스러운 해명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서로에게 어색한 기류가 형성되었죠. 그 계기로 ‘절친’이란 틀에 서로 다른 채색을 입힌 까닭이 아닐까 하는 시간에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성에는 ‘기대’라는 집착이 자라나고요. 그러면서 섭섭함과 오해를 낳지 않습니까. ‘절친’이란 실체는 원래 없던 것이고 착각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품었던 ‘절친’의 의미에서 멀찍이 물러나니, 한결 가벼워지더군요. 돌아보면 나 자신만큼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외부에 존재할까요. ‘절친’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약한 마음일진데 이처럼 허망한 일은 없습니다. 이제 그 같은 ‘절친’의 대상으로부터 홀가분해지기로 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꺾이지 않은 내면의 세계를 구축한 지금이니까요. 이렇듯 본래 내 뜻과 다르게 왜곡된 공간에서 질식될 것만 같은 순간에 나도 발 딛게 되는 일이 때때로 생깁니다. 언어적 표현이 실제 모습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럴 때면 너무나 명명백백해지고요.  


  살면서 원만은커녕 일정한 사람과의 관계 유지하는 일만큼 어려운 과제가 또 있을까요. 나이 들었어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벌어지는 세상사 잡음은 돌아보면 별일 아닌 일로서  싱겁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도 합니다, 그녀에게 빙의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결정적인 한 방의 보호색을 띤 카멜레온처럼 과도하게 튕겨 나왔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내봤습니다. 누구나 바쁜 일과에 쫓기다보면 미세한 일을 간과해서 저지르는 누를 낳아요. 생각자체도 당장 앞에 펼쳐진 일에 매몰돼 단세포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덧붙여 대충 알게 된 단서 하나를 자신의 확증편향으로 몰고 가 오판하려는 일도 경계해야합니다. 이런 연유로 여유로운 생각을 잊지 않을 만큼의 일정 아래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 들면서 지금 내가 건네는 이 말이 상대에게 과연 합당한 말인가를 알아차리려 합니다.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적재적소가 아니라면 안 하니만 못한 결과라는 거죠. 말에도 숙성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무릎을 칠만큼 맞아떨어지는 말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임할 마음공부는 이렇게 끝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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