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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Jul 17. 2023

살기에 좋은 환경이란 대체 뭘까

  날을 가리지 않고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립니다. 벌써 3주째. 세찬 비바람을 맞아 유리창에 맺혀 흘러내리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들의 찌든 때를 말끔하게 씻겨줄 것인 양 시원스레 내갈기는 모습에 흠뻑 빠지곤 합니다. 지리하게 퍼붓는 저 비, 그치고 나면 대지 위에 할퀴고 지나간 상처와는 무관하게 싱그러움을 더한 초록들의 향연이 여보란 듯 뽐을 내겠지요. 


  그런데 장마로 눅눅해진 집안일을 어찌 감당할까요. 이미 파죽지세로 점령해버린 습기가 집안 가득합니다. 인상된 전기요금이 무서워서 에어컨 사용을 삼갔다가, 마지못해 제습기능만 살짝 돌리고 있습니다. 웬만한 더위가 아니라면 만만한 두 대의 선풍기 대응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빨래꺼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세탁은 가능하다 치고 이후 말릴 일은 어떻게 할런지. 긴 장마에 말림 기능이 없는 통돌이 세탁기에 의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이럴 때 구원투수가 된 동네 빨래방이 있습니다.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잠시 비가 멈췄을 때 서둘러 그 곳에서 해결을 봤습니다. 매장 안에 들어서니 이젠 익숙해진 무인안내기가 손님을 맞더군요. 이른바 우리는 ‘셀프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뭐든 혼자 척척 해결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생활 패턴이 빠르게 바뀌어 따라가야 할 과제로 가중된 피로가 끝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세대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이런 삶을 살아내고 있어요.  


  장마와 무더위가 겹친 여름철, 바깥활동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야외 운동을 감행하려다 보면 고령자의 건강에 위협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다수 걷기를 선호하는데 나이 들수록 요구되는 건 근력운동입니다. 마침 이를 보완해줄 구립 종합체육관이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어요. 이곳에서 주 3일간 정기적으로 다니며 근력을 키우고 있지요. 실내시설이라서 주중 언제라도 이용하기 쉽고 접근성도 좋으며 전문가의 지도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내 생활 권역 내에 이곳이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죠. 게다가 고령자 할인혜택도 있어 경제 부담까지 덜어줍니다. 이러면서 살기에 좋은 환경이란 뭘까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사라져가는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한 어느 작가가 있습니다. 그림전시에 이어 책까지 내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모 지역에서 살던 작가는 아이를 들춰 업고 산책을 나왔다가 해질녘 석양을 등지고 있던 구멍가게에 홀렸다고 합니다. 이에 곁들여 우리 마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소형 마트는 물론 구멍가게 비스무리한 점포들이 그들의 해묵은 연륜을 알리듯 점철된 표정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13년 전, 이곳에 정착할 때만 해도 아파트 초입에 늘어선 얕은 건물에서 묻어나는 촌스러움이 참 정겨웠지요. 대장장이가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한 철물점이 즐비했고 미장원 • 자동차 정비소 • 점치는 집 • 치킨 분식집 등등... 그리고 몇 년 후 그 곳은 재개발로 추진되면서 조용히 전멸했습니다. 


  다행이 몇몇 점포가 우리 동네에서 살아남아 옛 정취를 담고 있어요. 지붕에 얹힌 기와가  곧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에서 버젓이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떡볶이 가게. 그 앞에 놓인 어여쁜 화분들이 시절 따라 바뀌는데, 그 주인의 얼굴이 궁금해집니다. 촌스러운 색상이지만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그 곳에 시선이 꽂히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멈추게 합니다. 처음부터 떡볶이 매상을 올리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선을 모이게 한 효과는 분명한, 주인장의 아름다운 발상일지 모르겠네요. 요즘 나리꽃이 한창이며 맨드라미 채송화 이름 모를 꽃도 더러 볼 수 있어요. 출입하기에 부담 없는 건물에다 구수한 입담이 섞여 입 꼬리가 올라가게 하는 이런 가게들이 동네에 있어요. 생필품이 똑떨어져도 슬리퍼인 채로 후다닥 나가 구할 수 있고요. 잠깐 나들이에 지갑을 깜박하고 나갔어도 외상 구입재량권이 허용되는 곳이랍니다. 


  지금의 골목상점과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융합을 일으키는 한 몸과 같은 마을공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허름하고 작은 평수의 가게를 이용하다 보니 마음속으로 가게주인이 되어볼 때가 있어요. 가게는 주민들 손에서 자라나고, 잘 큰 가게는 주민들에게 되살림으로서 선한 경제순환을 이룹니다. 우리에게 안정된 식자재를 공급해주는 그들에게 지속적인 구입으로 감사함을 되돌려주고 싶을 때. 그들 또한 보답으로 좋은 물건을 주민들에게 제공해 주려는 마음도 키워갈 테고요. 이렇게 그들과 하나가 되고 협동으로 이어지면 우리 내면에 잠재되었던 거룩한 마음이 서로 공명을 일으키면서 온 마을로 퍼져갈 날도 오지 않겠어요. 이로써 아름다운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동력을 주고받는 뿌듯함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래된 가게가 사라지지 않기를요. 


  서울시 ‘서울미래유산’지정은 바라지 않더라도 오래된 가게가 살아남아 마을가치로 인정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언제든 대형자본의 플랫폼상권이 휘젓고 들어와 동네골목 가게를 쓸어버릴 날도 있을 듯싶어서죠. 덧붙일 얘기가 또 있습니다. 집 가까이 가게가 없는 영국은 먼 거리에 위치한 대형마트를 자가용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해요. 자가운전이 수월한 젊은이들과 달리, 기력 쇠진한 노인이 되면 위험에 노출되는 겁니다. 대형마트 이용접근에 취약해진 노인들이 운전기능을 잃을 정도에 이르러 곡기가 끊기고 긴 잠에 들다 주검이 되었다는 해외뉴스를 이해될 수 있나요. 늙어봐야 늙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겁니다. 누구나 늙을 날은 분명 다가오는, 그마저도 아주 짧은 시기라는 점을 기억해 두세요.  


  길어진 글,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살기에 좋은 곳의 조건으로 무엇을 꼽습니까. 건강한 마을에서 살고자 하는 게 아닐까요. 안전한 환경과 훈훈함이 감돌아 지속가능한 생활이 유지되는 곳. 이런 곳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만들어가야 하는 거죠.  개인적인 내 생각은 ‘가족처럼 대하는 마음을 서로 지니고 나누며 살아가는 마을’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요. 크게 보면 우린 모두 한 가족이니까요. 이쯤 나이에 세상을 살다보니 내 입장에서 살아볼 때가 있는가하면 내 자신이 세상이 되어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不二思想)과 접목되는 부분이지요. 

  나 자신부터 아파트 승강기에서 만난 이웃에게 웃음 띤 얼굴로 인사하기 또는 집에 초대해 차 한 잔으로 서로 알아갈 시간을 갖기 등 이웃의 헤아림을 시작합니다. 널리 퍼진 행복 바이러스로 살기 좋은 마을이 우리의 손에서 이루어지기를. 이것이 여름날에 내걸어보는 소박한 내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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