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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Dec 15. 2022

마지막 달에 내걸린 리추얼

  12월 달엔 한해 고마웠던 일들을 모아 리추얼한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거리를 메울 즈음 반사적으로 즐기는 조촐하지만 알찬 나의 연례행사다. 감사한 분들의 얼굴을 일일이 떠올려 선물을 고르고 마련하는 일. 소중한 얼굴들이 담긴 선물꾸러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작은 선물이나마 보답할 기회를 지녀 안도한다. 덧붙여 내 애장품이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아 그에 걸 맞는 새 주인을 찾는 분주한 손놀림도 이어진다. 이벤트의 주인공들은 내 삶에 새 길을 터준 분들과 거친 새벽바람을 가르고 신문배달에 나선 아주머니 그리고 아파트 환경미화원들이다. 진실한 분들이 내 주위 가까이 있음을 새삼 발견하는 마지막달이다. 광대무변한 이 우주에서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절묘한 접촉이 나와 맞닿아 있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하고많은 사람 중에 오롯이 그 분들이 특별한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난 행운을 맞을 줄이야. 선한 이의 존재는 자체발광만으로 깊고도 넓은 영적의 시간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내 안의 자리한 그 분들을 떠올리고 감사드리는 일은 그 어떤 기도 보다 내 안에서의 울림이 더 크다.


  올 들어 촘촘한 내 정신세계로 이끌게 한 인연은 두 분으로 집약된다. 인문학강좌를 선호해 들쑥날쑥 참여하게 된 그 분의 강좌가 결정적으로 내 가슴에 불을 집힌 것은 올 중반이후였다. 대학교수인 그 분의 인품을 몇 해 전부터 아름아름 알게 되면서 존경심이 싹텄다. 그분은 오로지 학문에 몰두해왔으며 일반인은 물론 소외계층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간다. 인문학을 전파하는데 전국 어디일지라도 몸을 사리지 않는 실용주의 학자다. 한편 생활인으로서의 면모 또한 당당해서 지식인의 품위를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분 두뇌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분량의 인문학보고는 나의 창작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 그 뿐인가. 모태 기독신앙인이지만 그 안에 머물지 않고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모습에선 타 종교인마저 거부감이 꺾일 정도다. 나는 오히려 객관화된 마음으로 기독교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실제 일부이지만 기독교의 진의에도 머물게 된 시간이었던 것이다.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촌각을 다투는 그 분이기에 개인면담의 요청은 엄감생심 내지 않는다. 단지 페이스 북이나 강의실 공간에서 머물러 있는 게 만남의 전부랄까. 우리가 비물질인 마음이 눈으로 잡히지도 만져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듯이. 한 개인의 정신에 자극을 줄 수 있다는 발견은 두 사람의 대면으로 밀도 있게 접촉해야한다는 주장을 기우로 전락시킨다. 무리를 이룬 어떤 공간 내에서 나누는 공감의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스승을 만난 일. 예전 뜻을 알기 어려운 한문 전서체나 예서체가 아닌 한글전용의 귀한 붓글씨체를 마주했다. 고 신영복선생님의 붓글씨체를 담아낸 캘리그라피를 가르치는 곳에 첫발을 내딛었다. 스승님의 초면은 내 상상과 조금 빗겨갔다. 그러다 한 달 두어 달 이어가며 지도해주는 붓의 글귀가 가슴에 와 닿으며 지향하는 그 분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밥 한 끼를 마주한 몇몇 자리에서는 과묵함 속에도 툭툭 튀어나오는 말씀은 예사롭지 않았다. 다행이랄까 그 분이 지닌 가치관은 내가 바라는 점과 맞닿아 있었다. 참되고 선한 것은 같은 토양에서 성장하게 돼있다. 식물도 공통의 뿌리에서 동떨어져 덜 접촉하면 시드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생명의 원리인들 어떠하랴. 영혼이 시들거나 정신력이 무력해지지 않도록 함에는 이 같은 가치관을 지닌 관계성의 유지가 더없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단순 소일거리로 여겼던 붓글씨와 힘겨운 씨름을 이어갔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내 뇌리에 내리치는 천둥벼락과 조우했다. 비로소 내 죽음으로 가르기까지는 변치 않는 반려의 자리로 내 곁에 남아있으리란 확증을 내 손안에 쥔 순간이다. 부단한 연습과 함께 극기가 요구되는데 한 획 한 획에 몰두하는 시간은 평온하다 못해 침묵 속 우주의 세계로 인도한다. 홀로 붓질하는 시간은 내 안에 침잠하는 고독과 머지않은 죽음에 친근해지도록 내게 마법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의도치 않게 붓글씨를 통해 만난 스승까지 이 행운을 어찌 감당할까. 


  가만히 오래 들여다봐야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생활 속 켜켜이 쌓인 일들을 훌훌 벗어내고 되도록 적은 수의 일을 지녀야 보석 같은 ‘한방’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젊을 때는 모든 가능성이 활짝 열어젖힌 상태라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움에 정력을 쏟아 붓는다. 그러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하지만 30대중반 이후에는 숨고르기에 들어가야 한다. 자신이 바라는 방향대로 잘 가고 있는지 재검하는 기간. 그러면서 40대에 이르러  중심을 잡고 흔들림이 없어질 때를 접하게 된다. 내 나이 75세에 이르러 보니 무릎을 팍 치게 하는 일들을 무수히 만났다. 누가 나이 들어가는 감을 두려워하는가. 이렇게 창의적인 일에 몸을 담은 것도 감사한데 해마다 선물과도 같은 사람들과의 맺음이라니, 올해에도 거룩한 연말을 맞았다. 80이 될 내 나이에는 또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게 한다.

  인연 또한 생물과도 같아서 그 한계에 대비하는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바 이어갈 수 있는 인연을 희망하지만 진실은 엄연하다 못해 시리다. 가까이 있을 때에 멀어질 일을 상기시키고 뜻하지 않은 이별에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을 나이가 바로 노년기가 아닐 성싶다. 짧은 만남도 떠나가는 이별도 인간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까이서든 멀리서든 당시 곁에 있을 때 충분한 교류를 나누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제 모든 존재와의 이별에 친절해지기로 했다. 이렇게 나이 들면서 점점 두려운 것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올 마지막 달에 내걸만한 리추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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