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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Nov 22. 2022

가족의 넓이

 홀로 갑작스런 신체사고를 당할 땐 대략 난감하다. 어떤 대처를 취해야 할지 판단이 단박에 서지 않는다. 본래 가족을 이루지 않은 처지이지만 긴박한 사태에서는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발동한다. 한 친구와 접속을 했다. 대략 대응책을 취합하고 황망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병원진료실에서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엇갈리며 포개진다. 혼자 사는 이가 힘에 부쳐 전이된 통증이 마음속에서 만져질 때, 누군가가 곁에 있어준다면 일어날 부정적 감정요인을 녹여낼 수 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봐도 혼자서 대응할 수 없는 일을 ‘우렁이 각시’ 같은 존재가 나서서 돌봐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런 서비스가 상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 앞에 등장했다. 서울시 ‘1인 가구 병원동행서비스’다. 서울에 거주하는 1인가구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이용료도 시간 당 5천원으로 저렴해서 전혀 부담이 없었다.


  2021년 12월, ‘병원동행 매니저’의 입회로 예약된 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수면 내시경은 보호자의 동반이 따르지 않으면 검사를 받을 수 없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능력이 고령의 나이에 이르러 야생초처럼 자라난다는 점에 그나마 안도한다. 기댈만한 대상의 부재가 되레 홀가분했고 혹여 남에게 부담을 안길지 모를 기대감일랑 애당초 품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당당함에 찬물을 끼얹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니.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마다 보호자 대동 요구가 늘 따라붙어 불편했다. “보호자는 누구시죠?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데요.” 레코더처럼 반복되는 성가신 요청에 “제 자신이 보호자인데요.”라며 응수하지만 번번이 지나치기 일쑤다. 병의 대응판단은 물론 의료행위 채택 유무에 관한 결정은 주인공인 나의 몫이 아닌가. 하지만 시시비비를 가릴 만큼 큰일도 아니라서 애꿎은 친구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서 서둘러 타협을 했다. 

  이 서비스를 알기 2개월 직전, 나는 뜻하지 않은 일로 손목골절을 당했다. 어이없는 실수로 다친 손목을 부여잡고 세 곳의 병원을 전전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수술해야 할 정도라 큰 병원으로 가라했고, 대학병원에서는 예약이 꽉 차 수술을 받아줄 수 없노라 거절당했다. 어렵사리 연결된 개인전문병원에서 한밤중 11시에 수술을 마칠 동안까지 길 위를 헤맨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그 날은 짓궂게도 금요일이어서 내 생애 긴긴 하루로 매겨진 힘든 시간이었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간병인의 손을 빌리면 되겠지 라는 안일했던 생각은 몇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입원기간이 일주일 이상의 조건이어야 간병인파견이 용이하다는 단서 앞에 맥이 풀렸다. 수술 다음 날부터 이어진 불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속옷을 갈아입는 건 물론 용변을 보는 것조차 한쪽 손으로 해결하는 데에 번거로움이 따랐다. 세수는 눈곱을 뗄 정도여서 물 적시는 시늉에 그쳐야했고, 머리도 감지 못해 더러움을 감수했다. 퇴원 후 회복될 때까지 이어진 여러 달을 장애자가 되어 지냈다.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병원동행서비스’를 딱 한 번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고 든든하다. 내친김에 이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서비스로 거듭나길 바라는 바람과 욕구를 추가로 날려본다. 세집 중에 한가구가 1인가구라는 상징적인 통계를 보라. 가족의 개념 또한 혈연중심의 인식에서 점차 벗어나는 움직임도 있지 않은가. 어느새 신개념의 ‘가족의 넓이’로 옮겨져 팽창을 거듭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같은 시대의 변화를 누구인들 외면할 수 있을까. 문제는 국가행정이 이 같은 세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행정업무의 혼재가 사각지대를 낳고 그로써 피해를 겪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오랜 기간 뜻이 맞아 동거해온 두 여성이 법으로 인정받기 위해 한 여성이 다른 쪽을 딸로 입양했다. 제도권 안에 들어갈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통상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모녀간의 나이 차의 근소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재독간호사인 두 여성은 동성 간 결혼을 통해 부부로서 인정받았다. 더 늙고 병들기 전에 안정적인 돌봄을 합헌적으로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돌봄이란 두려움에 맞서 걸만한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총괄 의료통합서비스인 ‘간호간병통합서비스’와 ‘방문간호사제도’ 모두 지금 실행 중에 있기는 하다. 다만 혜택가능한 곳이 손꼽을 정도여서 원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바라 건데 이 모두를 망라한 원스톱복지시스템으로 확장시켜 누구든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멀지않기를 희망해본다. 지금까지 살아본 경험을 들춰내 보건데 복지국가시스템 발동은 늘 진화해왔으니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 일단 기다려보자. 하지만 지나친 기다림으로 우리 같은 고령자들에게 사후약방문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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