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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Nov 07. 2022

다중의 죽음 속, 단상

  얼마 전까지 착각 속에서 살았다. 내 언저리에 유영하는 시간들이 넉넉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바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그런 생각의 표층들이 요즘 들어 부쩍 얇아지고 있다. 언제라도 깨질지 모를 내 몸에게 안부를 묻는 일이 잦아졌다. 무뎌진 몸뚱이로 활동영역이 위축되고 여태껏 잘 돌아가던 일상생활 동작에 경고등이 켜졌다. 동굴에 떠밀려 격리될 날도 머지않으나 지레 겁먹지 않기로 한다. 컴컴한 곳에 들어서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앞으로 내딛기 어렵지만, 곧 커진 동공이 주변을 밝혀 주리란 이치를 꿰찼기 때문이다. 이제 목전에 놓여 챙겨야 할 일들을 핑계 삼아 뒤로 미루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으리라. 이런 일들이 나를 다그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 무렵, 느닷없는 이태원발 부고를 받았다. 


  그 날도 평소대로 밤 10시쯤 잠에 들었다. 어김없이 폰 소리를 줄여 놓았지만 그날따라 울려대는 신호음이 나를 몇 번 깨웠다. 잠깐 찌푸렸지만 이내 잠에 들었고 이른 새벽에 눈을 떠보니 생각지도 못한 대문짝만한 불행이 배달돼 있었다. ‘이태원 압사 참사’ 한창나이의 젊은 주검들이 분초를 다퉈 150명을 넘겼다는 소식. 세계적으로 치안이 잘된 나라로 손꼽히는 한국. 정작 보호받아 마땅한 젊은 목숨들을 내팽개친 상식 밖의 일이 현 정부에서 일어나다니 창피했다. 며칠 지나 이태원역으로 달려갔다. 유쾌 발랄한 웃음 띤 얼굴로 올랐을 그들을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따라 나도 올랐다. 층계 윗부분에 이르자 영안실에 당도한 듯 향냄새가 짙게 풍기며 TV를 통해 익숙했던 장면이 와락 나를 당겼다. 서로 다닥다닥 엉겨 붙은 꽃다발들이 마치 몸을 털 듯 일어서려는 그들처럼 느껴져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얼빠진 자세로 서있는 것 외에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별반 없었다. 사그라질 늦가을햇볕을 맞고 있으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모르는 영혼들과의 해후였지만 전혀 남 같지 않은 그들을 따뜻이 감싸 안아줄 정도의 내 체온으로 변환되길 바랄 뿐.


  대형 참사에 무작위로 노출될 일이 빈번할,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까지 얹히면서 다층적 위험에 노출됐다. 그리고 언제 덮칠지 모를 각종 위기와 전쟁 확산의 위험이 누구라도 밟을 지뢰처럼 다가와 마음을 옥죄여온다. 이젠 각자 알아서 대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나. 젊은 그들이 먼저 가고 이 늙은 몸은 남아 처연한 감정과 그로인해 생겨난 어색함은 어떻게 감당할 건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생각의 반전을 꾀해 본다. 운이 좋아 목숨이 붙어있는 내게 죽음의 결을 더 연마할 기회로 도치시키기로.  

  녹록치 않은 순연의 죽음에 기대어 나를 직시한다. 멀지않은 죽음의 시간대에 시선을 멈추다 보면 세상 한 부분이 짙게 부각될 때가 있다. 그리고 갑작스레 싱겁게 느껴진 부분에 이르기도 하는데 덧없어하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니 목맬 일 없고 남을 후려칠 일도 줄어든다. 젊은 날 바쁜 시간 한가운데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서성대던 잡다한 일에서 벗어난 지금은 챙길 일로만 또렷이 모아지면서 편안하고 안온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린 ‘이 세상에 살려고 내려왔지 무엇이 되려고 온 게 아니다.’라는 단순하나 또렷한 이 선명성. 나이 75세에 이르러서야 취하게 된 이 벅찬 감응을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노년의 그림이 그들에겐 흑칠로만 느껴질 테니. 뚜렷한 사계절의 생애를 저들 각기 경험하지 못하고, 무한경쟁의 학습장을 거쳐 막 기지개를 펴볼 무렵 황망히 떠난 대다수의 젊은이가 이런 이유로 애석하다.  


  이제 내 삶을 마무리 할 일로 한껏 부푼 마음을 들여다본다. 설렘의 연속이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결의는 현실을 가로질러 내 뒤태로 자리 잡았다. 얼마가지 않아 내딛게 될 그 미지의 세계가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실수로나마 지고 갈 불안감은 떨궈 야겠다는 독백을 자주 한다. 죽음 앞에서 혼자 직면하게 될 여러 사안들을 열거하고 탐구하는 일. 고령에 이르러 맞닥뜨릴 적막감을 ‘건강한 고독’의 시간으로 전환시킬 과제는 그래서 엄중하다. 그러기 위해 죽을 날까지 따뜻한 체온으로 유지시켜줄 동무 같은 일거리를 내 곁에 두는 일이 중요하다. 늘 곁에 있어 벗 인양 즐길 거리가 있다면, 절친에 비길 바 없는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사람의 관계란 영원하지 않아 부질없음을 알게 될 날, 불쑥 자란 생각들이 자동 개입해서 패인 상처를 깔끔이 회복시켜준 일로 확인될 테니. 이제 벗의 개념을 사람 중심으로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물질의 에너지로도 득템할 일이 활짝 열렸음을 알았으니 그 선택은 본인자유에 맡긴다. 단지 찾아가는 수고가 따르겠지만.    


  누구나 홀로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 단지 개개인이 느끼는 현타가 늦거나 앞당겨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불현 듯 던져질 화두, 절대 절명의 고독과 친숙해질 시간이 요구될 일은 분명 다가온다. 이래서 누구든 자유롭게 고독에 머물다가 또 스스로 헤쳐 나올 자생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리라. 게다가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곡진 삶을 잘 마무리하길 원하는데. 잠시 머문 이 물리적인 우주공간을 정리하고 떠나는 일이 만만치 않아 외면한다고 해서 쉽게 넘어갈 일인가. 한 아기의 탄생에 우리 모두가 축복의 순간을 맞듯이, 죽음의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도 잘 살아냈음을 박수쳐 줄 통과의례가 그래서 필요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 떠나더라도 회한에 젖도록 ‘지금 이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낼 일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삶의 과제이며 우리 손에 꽉 틀어쥔 현주소이기도 하다. 

  나이순 아닌 죽음을 목도한 요새, 추모하는 마음에 되찾아야할 그들의 권익을 더해본다. 실천의 첫 걸음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보듬고 동참하는 일이었다. 11월 5일 저녁, 차디찬 차도 위 촛불로 메운 시청 추모의 장에서 그들을 살려내라는 말로 목청을 높인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두 번째 행동이었지만 그 담의 행적도 점진적으로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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