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늙어감과 이어질 죽음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씁니다. 내 나이 60대 초로에 들었을 땐 의외로 차분해서 놀랐습니다. 실패로 점철된 날들도 많았지만, 60대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잡다한 일로부터 해방되어 내게 집중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 반면에 대나무 마디마다 가로질러진 눈금처럼 서른과 마흔의 연령 마디를 맞았을 땐 되레 난감해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서면 양식에 묵직한 나이가 더해졌음을 적시해야 하는 순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어색함마저 묻어나왔던 겁니다. 그런 날을 거쳐 60대와 70대란 안온한 나이에 이른 이후,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지요. 상식을 존중해왔고 양심을 지켜왔다는 점이 떳떳한 노후를 보장받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노후에 건져 올린 이 같은 선업은 젊은 날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질문 하나를 던지겠습니다. 당신은 전 생애에 걸쳐 행복할 때가 언제라고 짐작하십니까. 무릇 생의 출발점인 영유아기와 숨 몰아쉴 노년의 말기라고 생각합니다. 광명한 기운이 태동하는 시점과 저물어가는 끝점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요.
천진난만과 방긋 웃음 한 방으로 세상을 밝게 평정한 영유아기가 그러거니와, 병상에서의 어머니 마지막 모습 또한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천진함의 표상처럼 병상에서 맴돌던 어머니의 함박웃음이 우리에게 환희와 놀라움의 선물로 안겨 왔던 것이죠. 그 이후로도 쭉 잊지 못할 감흥으로 남았고요.
태어나 주어진 역할을 다했나 싶었는데 깊어진 병을 만난 어머니. 그때야말로 고단했던 짐을 내려놓을 마지막 길이라서 홀가분하지 않았을까요. 나 역시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한 실낱같은 두려움이 왜 없었겠습니까 만은, 몸소 보여준 어머니의 생전 교훈과 죽음의 학습이 두렵지 않은 일로 강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반인들은 향후 겪을 늙음의 실체가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연령대를 겪어 본 경험이 없어서죠. 동년배의 고령자들이 늙음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누구는 건강한 상태인가 하면 또 다른 이는 그렇지 않은 사정으로 천차만별로 나타납니다. 더 나이 들어갈 때의 심리 상태와 감정은 어떨까요. 비슷한 유경험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 연유로 아직 도달하지 못한 80~90대 선배들의 말과 행동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지요. 네 살 위의 친언니와 주변 선배들의 얘기를 통해 알게 된 점은, 한 가지 이상의 지병들을 지녔지만 그들은 서로 동고동락하는 법을 터득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85세 전후로 일상생활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점도 공통사항이었고요.
그 위에 불거진 점은 그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젊을 때보다 높아져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는 겁니다. 노년에 이른 뇌는 정서 함양이 뛰어나고, 주변 변화에 대한 적응력 또한 향상되는 시기를 맞아 행복감의 수치를 끌어올린 까닭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경학계의 근거 자료도 나와 있습니다.
노화에 대한 희망적 사실이 밝혀짐에도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식을 줄 모르는 사회적배경은 뭘까요?
막연하고도 근거 없는 지적이 거리마다 도열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불쌍하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은 보기에 추하다, 노인의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난다, 등등의 쓸모없는 세대로 차별하고 폄하하려는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이 사회 근간을 이룬 때문이겠지요. 물론 옷과 몸을 깨끗이 관리하지 못해 냄새를 풍기는 일부 노인이 있겠으나, 비단 노인에게만 국한해서 몰아갈 일일까요. 나는 공공의 거리에서 지나치는 청장년들 몸에서도 악취를 맡은 적이 더러 있습니다.
노인들은 살아온 시간만큼 몸으로 체득한 생존방식과 지혜를 개발해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안목 또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사정을 단편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까지 헤아리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물론 모든 노인이 다 그럴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람직한 노년의 상으로 이행하려는 과정과 그 변화의 양상을 개괄적으로 알릴 뿐. 오로지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괜찮다면 그만입니다. 태어나 관통될 늙음이 면피 될 수 없음을 숙지한다면, 내 늙음의 밭을 가꾸기 위한 도전에 적극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 든 사람의 다수가 젊은 날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젊은 날에 빚어진 혼선과 정체성의 흔들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요. 체력은 비록 바닥을 향했지만, 나이를 더해 매 순간을 거치면서 삶의 질감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음을 늙어서야 깨닫게 되니까요. 따뜻하게 데워진 마음의 온도가 볼품없어진 몸을 위로삼아 감싸주고 있지 않나, 죽는 날까지 살아갈 날들에 대한 자신감마저 키워냈습니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동요하지 않고 닥쳐온 어려운 과제도 쉽게 척척 헤쳐나가는 능력의 보유자가 되었고요.
또한 ‘늙음’이란, 거부의 대상에서 위상을 재정립하고 높여줄 위치로 도치(倒置)된다는 것을 그 나이에 이르지 않고서는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노후의 강 끝자락에 도달해서야 절로 깨우치게 된 인생의 의미가 도도히 흘러왔던 강의 원천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순간을 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늙음’이란 실체가 이와 같으니 다가올 노년을 두려워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