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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고독과 친숙해질 시기

by 정미영


여태껏 착각 속에 빠져 살았습니다. 내 언저리에 유영하는 시간들이 넉넉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바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의 표층들이 요즘 들어 부쩍 얇아지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깨질지 모를 내 몸에게 안부 묻는 일이 잦아졌지요. 무뎌진 몸뚱이로 활동영역이 위축되고 이때껏 잘 돌아가던 동작에 경고등마저 켜졌습니다. 동굴에 떠밀려 격리될 날도 머지않으나 지레 겁먹지 않기로 했지요.

컴컴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발 내딛기 어렵겠지만, 이내 커진 동공이 주변을 밝혀 주리란 이치를 꿰찼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전에 놓여 챙겨야 할 일들을 핑계 삼아 뒤로 미루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으렵니다. 이렇게 도열한 일들이 나를 다그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 무렵, 느닷없는 이태원발 부고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밤 10시쯤 잠에 들었지요. 어김없이 폰 소리를 작게 줄여 놓았지만 그날따라 울려대는 폰 시그널이 몇 번이나 잠을 깨우더군요. 짜증이 났지만 다시 잠에 들었고 다음날 새벽 눈을 떠보니 생각지도 못한 대문짝만한 불행이 배달돼 있었습니다. ‘이태원 압사 참사’ 한창나이의 젊은 주검들이 분초를 다퉈 150명을 넘겼다는 소식이었죠. 세계적으로 치안이 잘된 나라로 손꼽히는 대한민국. 정작 보호받아 마땅한 젊은 목숨들을 내팽개친 상식 밖의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졌다니 창피했습니다.

이틀을 접고 나서야 이태원역으로 달려갔지요. 유쾌 발랄한 함박웃음 띤 얼굴들로 피어올랐을 그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습니다. 역 층계 위로 오르자, 마치 너른 영안실인 듯 짙은 향내가 풍겨왔고 TV를 통해 익숙했던 장면들이 와락 나를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흰 상여의 행렬을 연상케 하는 국화꽃다발이 툭툭 털고 조문객을 맞으려는 그들처럼 느껴져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습니다.

얼빠진 자세로 서 있는 것 외에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반 없었어요. 그런데 등 뒤로 사그라져가는 늦가을의 햇볕은 왜 그리 처연하고도 곱던 지요. 차가운 추모의 공간이 남 같지 않은 그들의 영혼들을 힘껏 안아주는 따뜻한 장소로 변환되기를 바랐습니다.


누구나 대형 참사로 무작위의 주검을 맞을 일이 빈번할, 어쩌면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까지 얹히면서 다층적 죽음에 우리가 노출됐습니다. 그리고 언제 덮칠지 모를 각종 위기와 전쟁 확산의 위험이 도사려있고, 언제라도 밟힐지 모를 지뢰로 느껴져 마음이 옥죄어들었습니다. 이젠 각자 알아서 위험을 대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나요. 젊은 그들이 떼로 떠나버려 좁디좁은 골목이 꽹한 채 적막만 감돌고 있더군요.

녹록지 않은 순연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려고 내려왔지 무엇이 되려고 온 게 아니다.’라는 단순명료한 삶의 선명성. 뚜렷한 생애 사계절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황망히 떠난 다수의 젊은이들이 그저 애석하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자녀와의 인연이 빨리 무너져 허망해할 유가족들은 어떠할까요.

운이 좋아 목숨이 붙어있는 나는, 다른 시각으로 생각을 돌려 우울감에서 벗어나기로 했습니다. 인연의 대상을 굳이 사람에게만 국한 짓지 말고, 연마된 내 손과 함께 길이 든 인위적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 것이었지요.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한 영원한 동반자로서 내 곁에 남아줄 확고부동한 대상일 테니까요.

언젠가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될 여러 사안을 열거하고 탐구해가는 일. 또한 고령에 이르러 맞닥뜨릴 적막감을 ‘건강한 고독’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과제는 그래서 엄중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죽는 날까지 따뜻한 체온으로 데워줄 동무 같은 일거리를 내 곁에 두는 일 또한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손을 뻗을 만한 위치에 있는 벗 같은 (혼자만의) 즐길 거리는 어떤 인물과도 비길 바 없는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요.


누구나 이생의 마지막은 홀로 맞게 되어있죠. 단지 개개인이 느끼는 현타가 늦거나 앞당겨지는 차이만 있을 뿐이죠. 언젠가 절체절명의 고독과 친숙해져야 할 일은 분명 다가옵니다. 이러하니 누구든 자유롭게 고독에 머물다 스스로 헤쳐 나올 자생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겠지요.

게다가 잠시 머문 이 물리적 우주공간을 정리해 떠나는 과정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외면한다고 해서 쉽게 접힐 일인가요. 한 아기의 탄생에 우리 모두가 축복의 시간을 제공하듯, 죽음의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 잘 살아냈음을 박수쳐 줄 통과의례가 그래서 필요한 겁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 떠나더라도 회한이 없도록 ‘지금 이 시간’까지 충실하게 살아낸 그들이라면 족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삶의 과제이며 우리 손안에 틀어쥔 현주소가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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