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장례식은 마을 이웃들이 나서 도모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친척 보다 이웃과 축적된 시간들이 친척 이상의 의미를 담아냈다는 뜻이죠. 오죽하면 ‘이웃사촌’이란 말까지 생겨났겠어요.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도 혈육 못지않았던 겁니다. 죽음 너머 고인의 빈자리를 그들만의 몸짓으로 추모했으니까요. ‘마을장례의 협동문화’는 이제 농촌이라면 모를까 도시에서는 일찌감치 박제돼 박물관에 내걸릴 지경입니다. 옛 장례식의 기본정신이 살아남아 우리 문화유산으로 기리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지요.
반면 요즘의 장례식은 어디를 가나 판박이입니다. 우리가 영안실에서 흔히 목격하는 일률적 프로그램을 상주는 따르고 있어요. 이는 상주에게 아주 편하고 효율적인 내용의 조합일 것입니다. 죽은 자는 영정 속에 갇혀 있고 상주의 얼굴만 도드라집니다. 고인은 별도 냉동실에 안치돼 문상객과의 괴리현상을 띠게 되는 것이죠. 고인이 그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서로 오가야 할 대화가 실종된 채, 흰 국화꽃에 둘러싸여 고인임을 알릴 뿐이죠.
조문객들은 상주 얼굴에 도장을 찍고 나서 이제 막 일을 마쳤다는 듯 다른 문상객을 찾습니다. 자리에 합석하면 자동적으로 음식이 나오죠. 단일 품목인 벌건 색의 육개장은 초상집 단골메뉴로 나와 당혹스럽습니다. 곁들인 반찬 내용도 거의 똑같습니다. 꼭 이래야 할까요. 그리고 조문객은 또 어떻습니까.
사회 저명인사의 장례식에서는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그렇지 않은 서민의 장례식장은 썰렁하지요. 장례식에서조차 위화감을 조성해야 할까요. 그런 대조적인 연출보다 실용적으로 마련된 조촐한 장례식은 어떻습니까. 요즘 결혼식도 가족 위주의 스몰웨딩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변화에도 유독 장례식만이 고착된 형식을 따르는 이유를 되짚어 볼까요. 첫째 고인을 위한 추모장이 아니라, 과시용으로서 상주의 사회영향력에 무게가 실린 까닭이고요. 둘째 우리의 잘못된 부고 남발에 있습니다. 이는 어부들의 거망식 고기잡이처럼 그간 뿌려놓은 만큼의 부의금을 회수하려는 형국이지요. 또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례식에 끌어들이려는 부의의 혼란시대입니다. 옛날 상부상조라는 선의의 뜻이 변질돼 상업화된 현실을 바라보며, 향후 바꿔지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부터라도 고인을 위한 조촐하고도 합당한 장례식을 만들어 가면 어떨까요. 소박한 조문객 중심으로 독특한 추모의 장을 창출해 볼 기회로 말입니다. 고인이 퍽 기뻐할 것입니다.
상을 당해 겨를이 없는데 그런 준비를 어찌할 수 있느냐고요. 어렵지 않습니다. 앨범에서 고인을 소개하고픈 사진을 골라 함께 한 고인의 행적과 추억을 나누는 공유의 시간을 갖는 것이죠(미리 고인과의 추억 사진을 많이 찍어놓기를). 고인의 애장품도 나열해서 그 안에 담긴 일화를 나누고, 식이 끝나면 돌아가서 각자 나눠 가진 유품으로 추모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고인과 못다 한 마음의 끝자락을 촉촉이 적실 애도의 시간은 그 어느 것보다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체면차림의 인사차 문상을 온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왔다가 잠시 머문 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헛헛한 장면 보다 훨씬 의미 있는 장례식이 될 테니까요.
고인을 중심으로 잘 치른 장례식을 생각한다면, 사전에 장본인이 유언장에 적시해 놓거나 주변 사람들을 모아 장례식 관련사항을 조목조목 상의할 것을 권유해 드립니다. 뒤에 유언장에 관한 얘기가 나올 텐데요, 거기에서도 상세한 나의 장례절차를 기록해 둘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치를 거룩한 장례목록도 장본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70대 이후에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을 소요할지 모릅니다. 되레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야말로 본인에게 가장 복된 나날이 되겠지요. 최고조의 행복에 이르게 할 그 일에 잡다한 일이 끼어들어 마지막 에너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죽음의 준비가 잘된 마지막 노년기라야 마음 더 깊게 안정될 테고, 이 몸뚱이에서 빠져나올 때 깃털보다 더 가벼워진 영혼으로 떠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