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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발광체에 이를 날

by 정미영

이런, 이런! 프린터에서 잉크가 찍혀 나오지 않는다니--- 분명 새것으로 교체했는데 무슨 이유일까. 익숙하게 다루어 왔던 기기가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머리부터 지끈거립니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는 기계치인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할머니세대로서 컴퓨터를 다루는데 별 무리가 없었고, 웬만한 상품은 인터넷 시장을 통해 구매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터넷 환경이 요새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고, 젊은이들 위주로 바뀌어가는 추세여서 난감할 때가 많지요. 젊은이와 달리 대처능력과 민첩함이 떨어진 이 노년에 그걸 쫒아가느라 쌓여가는 이 피로감을 어찌합니까. 언제까지 이 변화무쌍한 대응 처리에 나서야 할까요. 이젠 적정 시기가 오면 아예 접어버릴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끝이 없어 보이는 인터넷 학습으로 바닥 날 체력은 빤할 테고 머지않아 떠나려는 내 몸에게 짐만 될 테니까요.


새해 벽두부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15년간 사용해 온 프린터기에 이상 기류가 흐른 것이죠. 물건도 오래 끼고 사용하다 보면 생물처럼 정이 들지 않습니까. 아직 기능이 멀쩡한데 단지 교체할 소모품이 없다고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을까요. 이를 감행하려 든다면 내면에서 일렁이는 갈등이 요동을 칠 일이지요. 단종제품이라서 잉크 제작을 멈춘 지 오래라고 했어요. 2023년 초에 구입한 잉크카트리지 포장지를 뒤늦게 살펴보았습니다. ‘2021. 02’란 표시가 또렷했지요. 만들어낸 지 3년이 다 된 잉크의 내용물이 굳은 것으로 어림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쓸 만한 이 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려내고자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부은 소란이었습니다.


프린터에 긴급수혈하고자 검정 잉크의 재고여부를 각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마침 서비스센터와 인터넷상가에서 각각 하나씩 구입하였고, 방문할 기사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슴을 졸이는데 기사는 빠진 컬러잉크 자리를 가리키며 검정 잉크와 함께 꽂혀 있어야 작동된다는 점을 뒤늦게 말해주는 게 아닌가요. 아뿔싸, 내 딴에는 사용하지 않아 오래 꽂혀 있던 컬러잉크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틀 전에 제거해 쓰레기통에 버렸던 겁니다.

때마침 재활용쓰레기 수거 날과 기사의 방문일이 겹쳤지요. 지체하지 않고 단발에 튀어 나가 부랴부랴 쓰레기전용 양곡부대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엄청 추웠던 날, 저녁이었어요. 2m에 상응한 높이의 부대 속에는 이미 플라스틱 쓰레기가 반 이상 채워져 있었는데. 뒤엎고 원위치로 되돌려 놓을 태세로 고생한 끝에 그 쪼그만 폐 잉크카트리지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숨을 돌린 안도감도 잠시, 막판에 건 기대마저 수포가 될 줄이야. 기사의 손에 의해 재구입한 잉크 역시 먹통이었습니다. 포기한 채 밀려오는 실망감을 추스르며 새 프린터기기를 주문하고 있는 내 처진 어깨너머로 기사는 신상품도 5년 정도 사용연한에 그칠 거란 말을 흘리더군요.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이익창출은 이처럼 짧은 수명의 제품양산으로 소비자들을 능멸하려 드는 게 아닙니까. 그럴싸하게 홍보된 최신 제품에 눈이 돌아가게끔 유도하는 기업 영업방식을 어찌해야 하나요. 오직 전자제품뿐이겠어요? 얼마 입지 않았는데 싫증이 나서 쉽게 버려지는, 값싼 가격의 직조된 옷들이 거리마다 넘쳐납니다. 우린 이렇게 지구 공공재를 함부로 남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의 삶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예전 전기제품은 가용기간이 길었고, 고장이 나더라도 수리해서 고쳐 써왔습니다. 10년 사용은 예사였고 지금 소지한 전기다리미도 40년을 넘겼으나 고장 없이 잘 쓰고 있지요. 반면 요즘 전자제품은 출시와 동시에 사용연한이 매겨져 나오고 있다니. 평상 5년에서 7년을 주기로 신제품을 구입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과 새 물건에 공들여질 마음까지 옅어지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변화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노년층에게 새 기능이 장착된 전자제품일수록, 짧아진 사용연한으로 파생되는 낯섦이, 두통을 유발시키게 되어있죠. 게다가 향후 상거래는 인터넷망으로 확대일로일 테니, 노인층들에게 그나마 알량하게 주어진 아날로그적 제품 감각의 상실이 임박했음을 각오해야겠지요.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AI가 그 해결방안이 될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엉뚱하지만 그에 대처할 방안의 하나로 반란을 일으킬까 생각 중입니다. 몇 해 전 내 나이 80세에 이르면 소속된 모임에서 벗어나는 ‘이별식’을 갖겠노라 다짐했지요. 번잡한 사회 언저리에서 완전 벗어나 온전한 내 삶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나만의 시도랍니다. 지금 내게 걸맞은 맞춤 생활로 진입했어도 불필요한 요소를 말끔히 떼어 내지 못한 미진함이 남아있거든요.

내게 머물 생산적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서, 걸리적거리는 부분을 과감히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더 깊어진 배경이었습니다. 인터넷 교류에서 멀어질 일과 인간관계 축소에는 고립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관계의 대부분이 생애 액세서리로 그친 일이 많지 않았나요. 신변 장식물도 젊은 날의 한때일 뿐, 차오르는 내면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스스로가 발광체임을 알게 될 날도 분명 다가오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설픈 관계와의 미련일랑 망설임 없이 내동댕이칠 일입니다. 목마른 샘에 내 열정을 쏟아붓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열중하게 될 날이 될 테니까요.

첫 시도로 사용 중인 스마트폰을 옛 폴더 폰으로 바꿀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정보를 클릭하면서 아까운 시간들을 도둑맞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뿐인가요. 확인할 필요가 1도 없는 쓰레기 같은 정보 때문에 정신은 오염되고 황폐해져 갈 뿐입니다. 이제 남겨진 내 시간은 정선된 정보와 참된 교류로 채우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거꾸로 가려는 시도이며 주변에게 불편을 안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한 그 길은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 자연을 닮은 길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같은 결을 지닌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이루며, 진짜 사람답게 살고픈 간절한 염원을 담아내고 싶어서죠. 이 세상에 딱 한 번 태어난 목숨인데, 마지막 주어진 시간을 정월 대보름달처럼 환하게 밝히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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