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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죽음의 생전체험기

by 정미영

유언 작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유언이란 사후에 일어날 법률적 관계를 생전에 미리 정해놓은 유언자의 의사표시를 말합니다. 사후에 생길 분쟁의 소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재산의 분배기록은 기본이고 평소 고인이 지닌 인생철학과 가치관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실제 유서의 작성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준 시간이었고 죽음의 생전체험이었습니다. 이 같은 합리적인 이익이 있음에도 죽기 직전에 쓰는 게 유언장이라는 엉뚱한 인식이 보편화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마치 기대수명의 잣대로 자신을 비겨보며 좀 더 좀 더 하면서 미루는 일이죠.

그럼에도 나이순 아닌 예측 불허한 죽음의 사연들이 속속 드러나는 일은 대체 뭐란 말인가요. 게다가 기성세대 중 다수가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라면 모를까, 지닌 게 별로 없는 자신에겐 유언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려줄 재산이 여의치 않다면 정신적 유산이 그 빈자리를 화려하게 메울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것보다 뜻깊은 유산이 되지 않겠어요? 기재의 주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남겨진 재산처리와 장례절차에 관한 점입니다. 그런데요, 이 외에 그와 밀접한 대비항목이 의외로 많고 다양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비밀장소에 보관된 유언장을 꺼내 듭니다. 2~3년을 주기로 수정해야 할 부분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후 추모대상부터 손보는 일이 생겨나지요. 그사이에 사망한 분이 있지를 않나, 이런저런 사유로 추모객으로 모실 수 없게 된 대상도 생겨납니다. 손을 보고 나서, 이전의 유언장은 새로 작성된 유언장이 법적효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바로 폐기해야 합니다.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조작될 위험이 있으니까요.

유언장은 자필로 작성함은 물론, 주소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날짜와 사인을 남겨야 효력이 보장됩니다. 그 위에 공증까지 해두면 완벽에 가깝다 할 수 있지요. 이 같은 유언장과 병행해서 대비해야 할 항목이 남아있으니, 이에 소개합니다. 죽음 전후의 시점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위급한 일을(솔로에게 필수) 당해 판단력을 잃었을 때 필요한 일입니다.


첫 번째, 갑자기 쓰러졌을 때를 대비해, 몸 누울 시설을 찾아놔야 합니다. 시설업소 결정에 중요한 케어 내용(24시간 요양 혹은 간호서비스 제공여부/임종서비스 제공 여부 등등)은 천차만별이고, 그에 대한 비용도 달라집니다. 그때 노인 홀로 판단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는 것이죠(이를 대비해 사전에 노인 스스로 시설을 돌아볼 것을 권유). 이를 돕는 ‘신원보증인’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요.

두 번째, 사망 후에 이어지는 사망신고, 보험과 연금해지, 공공요금 해약 등등의 업무를 대신해줄 사람을 지정해 놓도록 합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물도 준비해둬야 함은 당연합니다.

세 번째, 휴대폰은 본인 가까이서 상시 휴대하도록 지정하고, 잘 보이는 집안 한 편에 긴밀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부착해 놓음으로써 가족 이외의 제3자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네 번째, 늙어 치매진단을 받았거나, 심신 제약으로 처리능력이 약화된다면, 성년후견제도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는 일도 필요합니다. 허술한 재산관리로 입을 수 있는 손실을 미연에 막을 수 있으니까요.

다섯 번째, 유언장과 그 밖의 중요한 서류가 보관된 은밀한 장소를 알리는 일인데요. 이 또한 사전에 믿을만한 사람을 지정해두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신중의 신중을 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혹여 본 취지에 어긋나는 일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사망 시점에 이르러 거쳐야 할 일이 이와 같으니 죽기도 쉽지 않을 태세입니다. 그냥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지 하겠지만, 죽음 앞뒤로 치룰 정산이 이처럼 대를 이를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로써 잘 마무리된 죽음이라야 맑은 영혼인 채로 홀연히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듯 저마다의 사람들이 존엄의 해침을 당하지 않고 마지막 명을 거두길 희망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밭을 갈 시기인 노년기가, 오랜 여정을 필요로 하고 마음의 정기를 모을 적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노년이 무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차근차근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하루하루의 ‘존엄생’으로 살아가는 일 또한 이에 버금가는 일이 되지 않겠어요.


요즘 ‘생전 장례식’ 또는 ‘이별식’이 새로운 의례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이 제대로 된 이별의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이죠. 사자(死者)의 영정으로 치루는 허망한 문상보다, 살아생전 생생한 얘기 장터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겁니다. 가까운 지인의 솔직한 육성을 통해 나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는 순간은 잊지 못할 기념식이 될 겁니다. 객관화된 내 모습을 대하는 순간인 거죠. 가짜 허물을 벗어던지고 진면목의 홀가분해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래서일까 뭔가 묵직함의 기운마저 안겨 오는 사전 의례식입니다.

이렇듯 좋은 의식은 잠들어 있던 의식을 일깨우고 억제되어 있던 힘을 풀어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마음에 내재해 있음으로요. 그런데요, 살아 맑은 정신일 때 전하게 될 부고의 느낌은 과연 어떨지요. 나 자신도 팔순을 기념해 지인들과 함께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며 작별 나누는 ‘이별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거침없는 말이지만 순화된 얘기로 오갔으면 좋겠고, 나의 실수담까지 아우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자리가 아니라면 묻힐 기억들이, 남겨진 내 삶의 기쁨으로 승화된 꽃을 피워낼 순간으로 장식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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