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이 우리 삶을 관통합니다. 찰진 만남으로 연속된 젊은 날에는 허기를 느낄 틈이 허용되지 않았죠.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늘 활기가 넘쳐났고, 그런 시기가 오래 머물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항상성이 유지되지 않음을 깨닫는데 걸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나이가 보태질수록 여남은 절친 숫자마저 쪼그라든다는 점도 추가 배송되지 않든가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만남은 조건에 따라 성립되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조건이 맞으면 지속되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는 핵심이 단순명료한 결과로서 안기는 것이죠. 젊어서는 딱히 와 닿지 않던, “평생을 걸쳐 참된 친구를 2~3명이라도 지녔다면 행운이다.”란 말이 새롭게 다가온 이유입니다. 노년인 지금, 이 말이 내 귀에 끝없이 맴도는 이유는 뭘까요.
오랫동안 꿋꿋했던 우정이 부지불식간에 빛바랜 경험을 마주한 적 없나요? ‘친구와 장맛은 오래 묵은 것일수록 좋다.’란 말이 있죠. 일부는 맞고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벗을 장려하는 말이지만 단지 물리적인 시간대가 산적하다고 해서 만사형통일거란 판단을 경계하라는 의미이겠죠.
쌓인 포인트 숫자만 믿고 언제라도 쓰일 가용재원쯤으로 여겨 온 우정 방식이 상대의 예의 없는 돌발적 행동 아래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의미가 이미 퇴색된 인연과의 억지 머묾도 주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요. 진정한 우정이란 오랜 시간의 공과를 거쳐 물이 오른 숙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노련함이 담긴 깊은 내면의 원천인 것이죠. 제대로 알고자 노력을 기울인 쌍방의 결과이기도 하고요. 어느 한 편의 노력만으로 이룰 상황이 못 되니까요.
젊은 날, 꿋꿋했던 절친 몇몇은 해외이민을 떠나 의외의 이별을 낳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더 나은 삶을 좇아 너도나도 해외이민을 떠났던 시절이었죠. 남겨진 친구일지라도 서로의 환경이 바뀌고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라지며 서먹한 관계로 돌아설 때가 많았습니다. 관계가 뜸해지면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데, 명분이 유지되어 온 관계에서도 별일 아닌 일이 오해로 번지며 흉터를 남기곤 했죠.
되돌아보면 모두 싱겁기 짝이 없는 얘기였어요. 어릴 적의 생각과 고민은 고만고만했는데, 중년 이후로 지니게 된 가치관이 서로에게 배치돼 마찰을 일으킬 줄이야. 가치 합일로 맺어진 사회친구가 어릴 적 벗보다 밀도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일은 허다하지 않나요. 질적 관계로의 이동인 셈이죠.
‘비혼’인 나는 오랫동안 학창시절의 벗 관계망에서 소외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가족 안 구성에 갇혀 있었으니까요. 그들과의 어릴 적 언어의 소통마저 실종되더니, 임계점에 다다르게 되더라고요. 더이상 내 삶을 퇴행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판단이 맹목적 만남인 그들과의 교류를 손절하기로 했습니다. 멀어져간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요. 늙은 탓일까, 옛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듭니다. 이제 살날도 많지 않으니 그동안 머물렀던 간극도 좁히지 못할 건 뭐 있겠는 거란 생각을 냈죠. 그들도 나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훌훌 털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이었거든요.
새해 들어 용기를 냈습니다. 한 동창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봤어요. 무심한 듯 옛 목소리가 흘러 전화에 담겼습니다. 이렇다 할 동요도 일지 않았고 그저 무탈한 마음을 나누었죠. ‘나’로 인해 파생된 미안한 마음을 친구에게 에둘러 전했습니다. 살펴보면 내 주변에서 스쳐간 많은 인연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은 나의 잘잘못도 얼마나 많았을까요. 지난날 어리석음의 점철로 생겨난 부정적 감정을 이젠 털어낼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나의 허물부터 돌아보는 것으로서 남겨진 날들을 보낼 생각입니다.
인연의 고리란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 같아서 돌봄이 받쳐주지 않으면 멸종하는 우리 몸의 세포와도 같지요. 그러므로 인연의 재정비 시점이 ‘죽음이 머지않은 지금’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새삼스런 생각이었어요. 그 출발은 살아 중요한 일들이 사소해지지 않게 내 앞의 현안을 서둘러 결론으로 짓지 않고, 재기 가능한 행동으로 바꿔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장고에 들었습니다. 현재 인적 교류에 미진한 점을 남기지 말자고. 우리와 같은 고령세대에게는 ‘다음 기회’가 허용치 않거든요. 언제라도 촌각을 다툴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고마운 인연들과의 내적 영감을 교감하지 못한 채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긴장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런 지금,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정돈된 내 마음을 기울이기로 했지요. 혀를 통해 내뱉게 될 말이 독이 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 챙기자는 거였지요. 결 고운 말로 이어지도록 마음을 챙기는 일상수행인 거죠. 올들어 부쩍 이 같은 생각에 불을 댕겼습니다. 죽음이 머지않은 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