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人 자를 몸으로 배우다

by 시온

플라톤은 완전한 이데아 세계를 상정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고, 진정한 진리는 저 위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이 사상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일상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오늘 마주한 사람, 나눈 대화, 함께한 식사가 모두 '진짜가 아닌 것'으로 격하됐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런 생각에 불만이 있었다. 그는 진리가 저 위가 아니라 바로 이곳, 현실 속에 있다고 봤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렀다. 공동체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질은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는 선언이었다.


2천 년이 지나 1982년, 네덜란드 동물학자 프란스 드 발은 아른헴 동물원에서 침팬지 25마리를 관찰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직관을 확인했다. 힘센 수컷 한 마리가 무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수컷들과 연합을 맺고, 암컷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눈치를 보고 관계를 조율하는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침팬지도 정치를 한다. 관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영장류 전체의 생존 전략이었다.


사회적 지능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의 지능이 도구를 만들거나 사냥을 잘하기 위해 발달한 게 아니라, 복잡한 사회관계를 헤쳐나가기 위해 커졌다는 이론이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누구와 손잡아야 이익인지, 어떤 말이 신뢰를 깨뜨리는지. 이런 판단들이 두뇌를 키웠다.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영장류의 사회집단 크기와 뇌 용량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약 150명이라는 '던바의 수'도 여기서 나왔다. 관계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인지 능력이 곧 지능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이론들이 그저 흥미로운 학술적 논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절, 나는 이 모든 것을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주치의의 과도한 권고로 3년 가까이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가족과도 떨어져 지냈고, 외출은 마스크를 쓰고 운동하러 나갈 때가 전부였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우울감이 찾아왔다. 대단한 슬픔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커피 한 잔 나누는 것, 누군가와 식탁에 앉는 것, 별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이런 일상이 얼마나 큰 심리적 지지인지. 관계는 장식이 아니라 생존 구조였다. 사람 인(人) 자가 서로 기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설명을 예전에도 들었지만, 그때는 그저 좋은 말로만 들렸다. 하지만 극단적인 고립을 겪고 나니 그 글자가 달리 보였다. 인간은 정말로 혼자 설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플라톤이 틀렸다는 생각이 감히 들었다. 진리는 저 위 완전한 세계에 있지 않았다. 바로 여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온전해진다. 이건 약함이 아니라 설계의 결과다. 불안할 때 누군가의 말이 진정제를 대신하고, 슬플 때 누군가의 존재가 버팀목이 되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군가의 응원이 용기를 준다. 인간의 신경계와 정서는 관계 속에서 안정된다.


팬데믹 이후 세상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내게는 관계를 보는 감각이 달라졌다. 사람의 강함 뒤에는 필연적인 의존성이 있고, 도움을 청하는 건 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게 인간이니까.


회사에서도, 조직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우리는 매일 작은 정치를 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신뢰를 쌓고, 관계를 읽는다. 그게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제는 안다. 이건 인류 500만 년의 기본값이다. 사회적 지능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었다.


AI가 많은 것을 대체해도 이 영역만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관계를 읽고, 감정을 조율하고, 신뢰를 쌓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이건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이자, 가장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사람 人 자처럼, 우리는 서로 기대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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