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Meme)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가 말하려던 건 ‘문화도 유전자처럼 복제되고 퍼진다는 것’이었다. 종교, 이데올로기, 관습처럼 사람들 머릿속에 살아남는 생각을 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매일 보는 '밈'은 상당히 다르다. 짧은 영상, 웃긴 짤, 반복되는 문장. 며칠 지나면 잊히고, 알고리즘 따라 올라왔다 사라진다. 도킨스가 말한 밈과 지금의 밈은 완전히 다른 것일까?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복제되고, 변형되고, 살아남는다는 논리는 똑같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예전엔 사람들이 선택했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선택한다. 그 차이가 밈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과거의 밈은 생각의 단위였다. 어떤 생각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지금의 밈은 반응의 단위다. 조회수, 공유 횟수가 기준이다. 이해보다 감정이 먼저다. 웃음, 분노, 공감. 생각할 틈이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밈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반응을 끌어내는 신호가 되었다. 생각하기 전에 손가락부터 움직인다.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화내지만, 정작 뭘 생각했는지는 남지 않는다.
지금은 생각을 포기하고 감각만 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걸 개인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정보는 넘치고, 시간은 없고, 기준은 '이해되나?'에서 '반응하나?'로 바뀌었다. 이런 환경에서 생각은 비용이고 감각은 효율이다. 생각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 손해 보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이건 퇴보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인쇄술이 나왔을 때도, TV가 나왔을 때도 비슷한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균형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번엔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점이 다르다.
'생각 좀 하자'는 계도적인 말로는 안 된다. 차라리 이렇게 해보는 게 낫다. 감각을 부정하지 말 것. 감각 위에 생각을 얹을 것. 밈을 없애자고 하지 말고 다시 해석할 것.
감각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이 왜 반응하는지 인정한다는 뜻이다. 웃음과 분노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감각은 시작점이다. 그 위에 생각을 얹는다는 건, 한 박자 늦춰보는 것이다. '왜 웃기지?', '만든 사람의 의도는 뭐지?', '누구한테 유리하지?'. 질문 하나만 던지면 된다. 밈을 다시 해석한다는 건, 같은 장면을 다른 맥락으로 보는 일이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다. 감각으로 들어가서, 생각으로 데려오는 일. 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안내이다.
우리는 생각을 잃은 게 아니다. 생각하기 전에 감각에 지쳐버릴 뿐이다. 그 피로를 막을 순 없다. 하지만 그 이후는 선택할 수 있다. 밈의 시대에서 생각을 지킨다는 건, 밈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밈 위에 의미를 다시 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