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서울'의 부활

극장에서 만들어진 클릭, 생각이 사라진 뉴스

by 시온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 제도 등에 대한 기사는 조용히 지나가고, 유명인의 식단, 투자 성공담, 소소한 일상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런 기사들이 왜 계속 전면에 배치되는 걸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이 "모범 답안"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부동산도, 취업도 예측이 안 되는 시대에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했더니 잘 됐다는 거야?" 유명인의 성공 스토리는 불확실한 세상의 구체적인 해답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 해답이 착시라는 데 있다. 유명인은 정보 접근성이 높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실패해도 회복할 자원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성공담이 마치 평범한 사람도 따라만 하면 되는 것처럼 포장된다. "이 사람은 이렇게 투자해서 100억 벌었다"는 기사는 임금 구조, 주거비, 정보 격차, 부모 자산 같은 질문들을 지워 버린다. 남는 건 개인의 노력과 선택뿐이다.


그렇다면 기자들은 이걸 모를까? 아니다. 다만 이 소재가 너무 편하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유명인 인스타그램 캡처 몇 장, 간단한 코멘트 몇 줄이면 기사가 완성된다. 취재도, 팩트체크도, 전문가 인터뷰도 필요 없다. 게다가 클릭도 잘 나오고, 광고주와 마찰도 없고, 권력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배우 A의 재테크 비법"은 "청년들은 왜 집을 못 사는가?"보다 훨씬 쓰기 쉬운 기사다. 전자는 30분이면 되지만, 후자는 며칠이 걸린다.


이 지점에서 흔히 대중의 수준을 탓하지만, 그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청중이 愚衆일 수는 있어도, 무엇을 전달할지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필터와 책임이 있다. 구조적 질문을 던지는 대신 안전한 성공담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여 사회의 인식 지형을 바꾼다.


물론 이건 상호 강화되는 문제다. 독자가 "조금 더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찾지 않으면, 기자는 "조금 더 팔리는 글"로 생존해야 한다. 그 결과 사회 전체의 사고 능력은 점점 얕아진다. 하지만 미디어는 단순히 수요에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무엇을 기사로 만들고 무엇을 버릴지 선택하는 순간, 이미 세계를 설계하고 있다. 그 선택에는 최소한의 수준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잘 짜인 서사를 현실로 착각하는 현상 말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게 바로 그거다. 유명인의 일상, 예능 프로그램, 사생활 기사는 정교하게 연출된 무대다. 관객인 우리는 "그냥 재미로 보는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그 무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무엇이 성공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지. 이 모든 게 극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문제는 그 결과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너무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데 있다. 사유는 점점 노동처럼 느껴지고,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수익 모델이 된다.


더 불편한 건 이 흐름이 점점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고, 플랫폼은 머물게 만드는 콘텐츠를 계속 띄운다. 이 시스템은 검열보다 영리하다.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할 필요를 없애 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유난스러운 걸까?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생각하는 소수와 따르는 다수의 구도는 늘 존재했다. 다만 지금은 사유를 억압하는 방식이 훨씬 세련되고 부드러워졌다.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준다. 이 차이는 크다.


사유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알고리즘은 느린 글, 복잡한 분석, 불편한 질문을 구조적으로 뒤로 밀어낸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작은 커뮤니티로 들어간다. 능력이 줄어든 게 아니라, 드러날 공간이 줄어든 거다.


불안의 정체는 이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가 아니라, 그들이 서로를 찾지 못할까 봐. 혼자 가면 빨리 갈 수는 있지만 같이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중요한 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되는 일이다.


희망은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생각하게 만드는 글을 공유하고, 얕은 기사는 안 읽고, 질문을 던지는 댓글을 다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모이면 알고리즘도 조금씩 바뀐다.


이 답답함이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나 자신이 극장의 관객으로만 머무르지 않게 해 준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계속 묻는 일.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은,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당신은 스승을 dis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