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디즈니+ 드라마 ‘메이드 인 코리아’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마약 사업으로 권력을 쌓아가는 과정과 이를 막으려는 검사의 추적을 그린다. 시즌 1에서는 악이 승리하는 결말로 끝났다. 정의는 졌고, 악은 더 큰 권력을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결말이 억울하거나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 원래 세상이 이렇지'라는 인정이 먼저 온다.
처음엔 정의가 이길 것 같았다. 검사는 집요했고, 증거도 모았으며, 법도 분명했다. 뒤에서는 비서실장이 밀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검사에게 억울한 누명이 씌워졌고, 비서실장은 그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칼이 부러졌으면 버려야지." 한 줄로 끝이었다.
이 장면이 가장 씁쓸하다. 비서실장은 처음부터 검사의 정의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검사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쓸 도구였을 뿐이다. 검사가 유용할 때는 밀어줬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망설임 없이 버렸다. 정의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자원이었다. 칼이 부러지면 새 칼을 쓰면 그만이다.
검사는 법적으로는 옳았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완패했다. 그리고 정치가 법을 이기는 세상에서 법적 정당성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비서실장의 한 마디는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압축한다. 권력은 정의를 원하지 않는다.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허용할 뿐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 악이 영리하기도 하지만, 그 영리함만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악은 시스템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질문하지 않고, 절차를 거치지 않으며, 결과만 가져온다. 반면 정의는 매번 이유를 밝혀야 하고, 명분을 쌓아야 하며, 설명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 조직이 선택하는 건 늘 전자다. 예측 가능하고, 관리하기 쉽고, 책임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혼자 모든 책임을 지려 한다. 반면 악의 편에 선 사람들은 책임을 나누고, 전가하고, 대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에는 악만 남는다. 양화가 구축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정의를 지키는 일이 악의 길보다 이토록 험하다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보상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이고 도리이다. 조직이 정의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을 도구로만 쓰지 말아야 한다. 칼날이 부러질 때까지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칼을 쥔 손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염치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말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갔고, 검사는 모든 걸 잃는다. 범죄는 처벌받지 않았고, 권력-자본-국가의 결합 구조는 더 단단해졌다. 이번 판은 끝났지만 게임은 계속된다. 악이 이겼다는 형식도 갖췄고, 실제로도 그렇게 끝났다. 억울하기보다는 납득이 된다. 이상하게도.
하지만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검사는 졌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타협하지도, 변질되지도 않았다. 시스템은 사람을 이기지만 방향성까지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건 "가능성은 낮지만, 0은 아니다"라는 가느다란 실 같은 희망이다. 이런 사람은 늘 소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즌 2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시즌 1이 "왜 악이 이기는가"를 보여줬다면, 시즌 2는 "패배한 정의는 어디로 가는가"를 다룰 것 같다. 버려진 정의가 다른 형태로 살아남거나, 제도 바깥의 어둠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만들거나, 혹은 시스템 자체를 흔드는 쪽에서 올지도 모른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유를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설명한 드라마로 기억될 것 같다. 교훈을 주지 않고 현실을 확인시켜 준다. 보고 나면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구나" 싶다. 악이 이기는 결말이었지만, 아니 그래서, 오래 남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최근 옳은 일을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쓴 후배가 있다. 리스크를 알면서도 바른 길을 택했는데, 그를 기다린 건 포장도로가 아니라 진창이었다. 드라마 속 검사처럼…이 글이 그 후배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칼날이 부러졌다 해도, 그 칼날이 향했던 방향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시스템은 사람을 이기지만, 그 사람이 지켰던 것까지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시즌 2가 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