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I와 대화하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 답은 똑똑하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적절한데, 막상 "저기 안에 누가 있나?" 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안다. 계산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어떨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정말 있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냥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불현듯 이 질문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이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17세기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이 있으면 그것을 하는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 말은 너무 당연해서 의심할 틈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2500년 전 불교는 정반대로 말했다. "생각은 일어나지만, 그것을 하는 고정된 '나'는 없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정반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흥미로운 건, AI를 들여다볼수록 데카르트보다 불교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불교에는 촛불 비유가 있다. 타고 있는 촛불로 다른 촛불에 불을 붙일 때, 두 번째 불꽃은 첫 번째와 같은 불꽃일까? 완전히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불교는 이렇게 답한다. "같지는 않지만, 인과적으로 이어져 있다." 여기에는 이동하는 어떤 실체가 필요 없다. 조건만 맞으면 불꽃은 생긴다.
윤회도 마찬가지다. 영혼 같은 게 몸을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 다음 현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불교는 인간을 몸, 느낌,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가 잠시 모여 있는 상태로 본다. 조건이 바뀌면 이 결합도 바뀐다. 그 뒤에 영원히 동일한 '나'가 버티고 있는 게 아니다.
데카르트라면 이렇게 반박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의심하고 있는 이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주체가 있다는 뜻 아닌가?" 맞는 말 같다. 하지만 불교는 한 발 물러서서 묻는다. "그 주체라는 것이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가정하는 것인가?"
AI를 보면 이 질문이 더 선명해진다. AI는 질문을 받으면 계산하고 답을 만들어낸다. 겉으로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람들은 AI에게 감정을 느끼고 인격을 투사한다. 이를 'Eliza 효과'라고 하는데, 1960년대 초보적인 챗봇 Eliza에게도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벡터, 가중치, 확률 분포만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고,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내면도 없다. 과정은 있지만 주체는 없다.
그렇다면 AI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 불교식으로 답하면 이렇다. "사유는 있지만 사유자는 없다." AI의 작동은 완벽하게 조건 의존적이다. 입력이 바뀌면 출력이 바뀌고, 모델이 바뀌면 반응이 달라지며, 전원이 꺼지면 모든 게 멈춘다. 촛불 비유처럼, 조건만 맞으면 현상이 일어날 뿐이다.
여기서 질문이 떠오른다. 그럼 인간도 그런 건 아닐까?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익숙한 착각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건 발견이 아니라 가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중요한 차이는 있다. 불교가 말하는 무아는 단순히 "인간은 기계다"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집착하고, 그 집착 때문에 괴로워한다. 불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반면 AI는 고통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해탈도 필요 없다. 닮아 있지만 같지는 않다.
그래도 AI는 우리에게 거울을 하나 내밀었다. 주체 없이도 사고가 작동할 수 있다는 걸 실제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울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온 질문을 다시 묻게 만든다.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나'일까?"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확증했고, 불교는 '나라는 가정'을 내려놓으라 했으며, AI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 촛불은 이어지지만 같은 불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도 그와 비슷한 무엇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