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서사의 객관적 데이터로의 전환
조직의 정점에 앉은 사람은 대개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우리는 믿는다. 적어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끔 아니 자주 그 자리는 능력이 아니라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것도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로.
최근 지인에게서 웃픈(bittersweet) 이야기를 들었다. 만 명이 훨씬 넘는 조직의 최고 경영자 자리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연달아 차지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았고, 모든 프로젝트는 성공이었으며, 자신은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리고 모든 조명은 당연히 자신을 향해야 했다. 거짓말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자리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허풍쟁이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의 자원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도구로 활용했다. 예산 배분의 기준은 회사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였다. 예민한 결정은 문서가 아닌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증거는 남지 않았다. 실제로 사법적 위험이 닥쳤을 때도 그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책임은 아래로 흘렀고, 실행한 부하들만 법정으로 내몰렸다고 한다.
같은 패턴의 리더들이 연속으로 CEO 자리를 차지한 건 우연이 아니다. 시스템 자체가 그런 사람을 선호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대형 조직일수록 성과를 측정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여러 조직, 여러 사람이 동원된 프로젝트의 경우 공과를 조직별 또는 개인별로 정확하게 가늠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럴 경우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유리하다. 화려한 발표, 상징적인 이벤트, 언론 인터뷰 등, 실제 성과보다 성과처럼 보이는 것이 더 빠르게 전파된다. 조직이 클수록 책임 소재도 흐려진다. 특히 지시가 문서가 아닌 말로만 이루어지면 증거는 사라진다.
이 글을 쓰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CF 퀸으로 광고 시장을 휩쓸던 모 여배우가 있었다. 어느 광고 공개 PT에 다섯 곳의 광고대행사가 참여해 열띤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곳의 발표자가 모두 "그 여배우를 자기가 키웠다"고 주장했다. PT 주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당시 그녀가 워낙 대세였기에 어떻게든 자신들과의 연관성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혼란에 빠졌었다. 당시엔 그저 웃고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증거 없는 성과 주장의 전형이었다.
가장 씁쓸한 부분은 이런 리더들이 조직의 자원을 자신의 생존 장치로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수천 명의 가능성이 한 사람을 위한 무대 장치로 소진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이 조직에서 성장하며 높은 자리에 가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먼저 모든 중요한 결정에는 근거가 남아야 한다. 예산 배분, 인사 결정, 사업 우선순위는 반드시 문서화되어야 한다. 구두 지시는 아예 근거로 인정하지 않는 원칙이 필요하다. 성과의 정의도 달라져야 한다. 화려한 발표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결과로만 평가 받아야 한다. 고객 반응, 시장 점유율, 수익성 같은 객관적 지표 말이다. 무엇보다 권한과 책임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결정을 내린 사람이 책임도 져야 한다는 원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평가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글이 구성원 평가에 진심인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최근 조직 관리 분야에서 논의되는 AI 기반 평가 시스템이다. 본질만 보면, 이건 결국 '주관적 서사를 객관적 데이터로 대체'하는 시도다.
지금까지 성과 평가는 상당 부분 사람의 판단에 의존했다. 상사와의 물리적٠심리적 거리, 발표 능력, 사내 정치력이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상사에 순종적이거나, 말 잘하는 사람이 실제로 일 잘하는 사람보다 유리한 구조였다. 하지만 만약 평가 시스템이 실제 프로젝트 결과, 고객 피드백, 팀원들의 익명 평가, 의사결정과 성과의 연결고리 같은 데이터만 본다면? 화려한 말보다 조용한 성과가, 정치적 개인기보다 팀의 성장이 더 정확하게 포착될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조기경보 시스템으로서의 가능성이다. AI는 사람이 놓치기 쉬운 패턴을 발견한다. 성과 주장과 실제 데이터 사이의 괴리, 문서화되지 않은 의사결정의 반복, 특정 리더 아래에서 유독 높은 팀원 이직률, 자원 배분과 최종 결과의 비상관성 등. 이런 신호들이 쌓이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경고를 보낼 수 있다. 문제가 조직 전체로 번지기 전에 말이다.
물론 AI가 만능은 아니다. 창의성이나 위기 대응 같은 영역은 여전히 사람의 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증거 없는 성과 주장'이 통과되지 않는 환경은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이야기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록으로만 승진할 수 있는 구조 말이다.
결국 핵심은 하나다. 설명할 수 없으면 통과할 수 없는 시스템. 말이 아니라 데이터로, 관계가 아니라 기록으로,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공동의 검증으로 평가받는 구조. 그런 환경에서는 거짓말이 현실을 대체하기 어렵다.
조직의 리더는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6개월 후, 1년 후, 3년 후 시장과 평가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가지가 명확해졌다. 거짓말이 현실이 되는 자리를 막는 건 결국 우리의 몫이다. 화려한 말보다 조용한 기록을, 개인의 서사보다 공동의 검증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검증의 일정 부분을 기계의 냉정함에 맡기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