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거실, 자녀의 格子

by 시온

아나이스 예브티치는 2023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 후 거의 2년간 수백 통의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었지만 정작 면접조차 보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시간제 일을 하며 취준생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그의 아버지는 1986년 박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P&G에 입사해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침실 네 개짜리 집도 장만했고 넉넉한 노후 자금도 마련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이 이야기는 한 가정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 세대는 부동산 가격 급등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해졌지만, 자녀 세대는 취업난에 허덕이며 내집 마련은 꿈도 못 꾼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약 70%의 미국인이 아메리칸드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답했고, 80%는 자녀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가족 안에서도 세대 간 분열이 심화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사회로 나올 무렵, 경제는 분명히 상승 곡선 위에 있었다. 일자리는 풍부했고 조직은 사람을 필요로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오늘의 분주함이 앞섰다. 대학 시절 외국어 공부나 자격증 준비에 몰두하는 친구에게 '범생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도, 사실은 그만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가 부족해도 기회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Lady First'와 같은 기사도 정신도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성장은 정체되었고 취업 시장은 검증된 경력사원 위주로 돌아간다고 한다. 최근 대졸자 실업률은 6.5%로 전체 실업률 4.3%보다 훨씬 높다. 집값은 팬데믹 이후 50%나 뛰었다. 같은 가정 안에서도 경제적 지층이 갈라진다. 이런 조건 속에서 MZ세대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자기 이익에 민감해진 것은 세대간 가치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이다.


여기에 디지털 환경의 영향이 더해진다. 인류 전체를 한 화면에 담았던 '창백한 푸른 점'의 시대를 지나, 지금의 청년들은 전면 카메라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리며 성장했다. 이들은 말보다 문자로, 집단보다 개인으로 세상을 경험했다. 사람과 어울리는 사회적 훈련보다 디지털 기기를 통한 경쟁과 비교 속에서 성장했다. 화면 너머로는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갈등을 조정하거나 타협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 결과 자신의 격자 안에 스스로 고립되어 방어하는 데 익숙해졌다. 누군가와 의견이 다르면 설득하거나 협상하기보다 차단하고 회피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전 지대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만 소통한다. 성별, 인종, 종교, 이념은 물론 취미와 소속 집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르게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 세대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중요하다"는 보편적 가치를 배웠다면, 이들은 각자의 정체성에 따른 차별적 인정을 원한다.


이들은 연결되어 있지만 집단이 아니다. 문제에는 빠르게 반응하지만 그 이후를 책임지는 구조 안에 들어온 경험은 많지 않다. 이들은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책임질 권한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세대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연결된 개인'이라고 부른다. 개인이지만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지만 집단은 아닌 상태다.


그러니 지금의 청년들이 과도하게 예민하고 갈라치기에 익숙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도 경쟁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 과거에는 노력하면 어느 정도 결과가 따라왔지만,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리 자체가 없다. 누군가 선택 받으면 내가 탈락한 이유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별, 세대, 지역이 진짜 원인은 아니지만 분노는 그쪽으로 향한다.


기사도 정신이나 양보의 미덕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 이전에, 여유가 허락된 사회에서 가능했던 윤리였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그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여유는 주지 않으면서 양보만 바라는 일이다.


이렇게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고, 그 경험의 차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한쪽은 "요즘 애들은 왜 저렇게 예민한가"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기성세대는 우리 상황을 전혀 모른다"며 반발한다. 같은 가족 안에서도 세대는 갈라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이렇게 갈라진 세대를 어떻게 다시 이어붙일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간극을 인정하는 일이다.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왜 둔감할 수 있었는지를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유는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누렸던 안정은 우리가 더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가 그랬기 때문이다. 이 인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요즘 애들은 왜 저러냐?"는 말은 폭력이 된다.


청년 세대 역시 분노를 서로에게 향하는 대신 구조를 바꾸는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처럼 세대 간 분열이 심화되면 사회는 교착 상태에 빠진다.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를 비난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고, 그 틈을 타 극단적 세력이 제도의 맹점을 파고들어 전체를 좌우할 수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극단적인 이념이 부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해와 공감만으로는 통합이 이뤄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세대 간 화해가 아니라 세대 간 분업이다. 지금의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 구조의 문제다. MZ세대는 영향을 받지만 결정하지는 못하고, 기성세대는 결정하지만 결과에 대한 불만을 감당해야 한다. 이 비대칭이 지속되는 한 통합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기성세대는 방향과 한계를 설계하고 책임의 구조를 만든다. MZ세대는 문제를 감지하고 압박하며 변화를 촉발한다. 이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그 범위 안에서 실제 권한을 넘겨줄 때에만 책임도 따라온다. 책임을 맡겨보지도 않은 채 미성숙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들을 기존의 집단 안으로 억지로 통합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상설 조직보다 한시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참여 구조가 더 적합하다. 시작과 종료가 명확할수록, 그리고 책임의 범위가 분명할수록 참여는 오히려 깊어진다.


세대 통합은 서로를 닮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형성된 인간들이 같은 구조 안에서 각자의 몫을 맡는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기성세대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우월감이 아니라 이미 유효하지 않은 결정 독점이다. 그때서야 MZ세대는 비판자가 아니라 공동 설계자가 된다.


부모는 부자이고 자녀는 가난한 이 기묘한 시대에,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산다. 하지만 그 간극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다리를 놓을 자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작가의 이전글聖域이 된 連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