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과학철학은 무엇을 경계하는가?

by 시온

토마스 쿤과 파울 파이어아벤트. 두 사람 모두 과학이 정말로 합리적으로 진보하는지 물었다. 전통적 과학이 관찰에서 가설로, 가설에서 검증으로 이어지는 깔끔한 누적을 그렸다면, 이들은 그 그림이 실제 과학의 모습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관찰은 중립적이지 않고, 과학 발전은 단절을 포함하며, 과학 자체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공통점은 분명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도 크다. 쿤은 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에게 패러다임은 과학자 공동체를 조직하는 틀이었고, 정상과학은 그 틀 안에서 퍼즐을 푸는 활동이었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학혁명의 순간,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완전히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선택이나 가능한 건 아니다. 설득과 교육, 세대교체 같은 사회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쿤은 상대주의의 문턱 앞에서 멈춘 셈이다.


파이어아벤트는 그 문턱을 넘어갔다. 그는 노골적으로 과학적 방법론 자체를 공격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그의 말은 흔히 오해되지만, 이건 방임이 아니라 보편적인 과학적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주장이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나쁜 과학이었지만 과학은 바로 그 규칙 위반 덕분에 발전했다. 방법론적 일관성은 과학을 질식시킨다. 더 나아가 그는 과학이 신화나 점성술, 미신에 비해 더 우월한 방법론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과학과 국가 권력이 결합할 때 가장 위험하다는 경고까지 던졌다.


쿤이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게 만든다면,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을 경계하게 만든다. 한 사람은 記述者였고, 한 사람은 解體者였다. 이제 AI 시대에 이 두 사람의 말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쿤에게서 들어야 할 건 이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상인가, 위기인가.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과거 컴퓨터나 인터넷이 인간 판단을 보조했다면, 지금 AI는 판단과 평가, 기획의 일부를 대체하거나 전이시킨다. 이건 생산성 도구를 넘어 누가 판단하는가라는 규칙 자체의 변화다. 많은 조직이 AI를 쓰라고 하지만, 무엇을 인간 판단으로 남기고 무엇을 AI에 넘길지에 대한 합의된 패러다임은 아직 없다. 지금의 혼란은 개인 역량 부족이 아니라 패러다임 위기의 증상일 수 있다.


쿤은 정상과학의 위험도 경고했다. 패러다임 내부에서는 질문의 범위, 성공 기준, 좋은 연구의 정의가 자동화된다. AI에서도 마찬가지다. KPI에 맞는 보고서를 생성하고, 기존 지표를 최적화하며, 과거 데이터에 잘 맞는 전략을 추천하는 AI가 너무 잘 작동한다고 느낄 때, 이미 사고는 좁아지고 있을지 모른다.


파이어아벤트에게서 들어야 할 건 다르다. 표준이 되는 순간 무엇이 사라지는가? AI 시대에는 표준 프롬프트, 검증된 모델, 추천 알고리즘, 업계 평균의 정답이 있다. 누가 이걸 합리적이라고 정했나? AI는 본질적으로 다수의 데이터와 평균적 패턴, 과거의 성공을 강화한다. 이건 방법의 표준화이고, 그의 말로 하면 방법의 폭력이다.


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미래를 막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고다. AI가 추천하지 않는 전략,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 직관, 소수의 경험에서 나온 판단. 이런 것들이 제거될수록 혁신 가능성은 줄어든다. AI가 도구가 아니라 판사가 되는 순간, 이견은 비합리로 낙인찍힌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건 이런 것들이다. 우리는 아직도 같은 문제를 풀고 있나? 아니면 문제 정의 자체가 바뀌었나? AI가 답을 잘 내놓는 이유는 문제가 단순해서인가? AI를 쓰지 않는 선택, AI가 추천하지 않는 선택은 여전히 정당한가.


쿤은 AI 시대의 혼란을 비정상이 아니라 전환기의 정상 상태로 이해하게 한다. 파이어아벤트는 AI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사고를 단일화하는 순간을 가장 경계하라고 말한다. 쿤은 지금이 왜 이렇게 어수선한지를 설명해 주고, 파이어아벤트는 이 어수선함이 정리될 때가 더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두 사람 모두, 지금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스스로를 기생충으로 규정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