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의 시인 에머슨은 'What is Success?'라는 짧은 시에서 성공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화려한 업적도, 큰 재산도 아니다. 그가 말한 성공은 아주 소박하다. 다만 현실의 우리는 이 문장을 떠올릴수록 묘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과연 우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지 살펴봐야 한다. 요즘 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부조리, 편법, 전관예우, 순혈주의, 눈감아주기.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규칙이 있는데도 슬쩍 비켜 가는 행위들이다. 그런데 반칙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반칙을 보고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분위기다. 반칙한 사람은 멀쩡한데, 그것을 지적한 사람이 오히려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흔히 동네 건달이나 조폭을 두고 "양아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아치의 본질은 폭력성보다도 부끄러움의 결여에 가깝다. 규칙을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안 지킨다. 왜?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손가락질이 사라진 사회에서 양아치는 계산을 시작한다. "걸려도 별일 없겠지!", "다들 그러는데 뭐". 이 순간부터 반칙은 일상이 된다.
반칙이 줄어들려면 제도가 필요하고 감시 시스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바탕은 문화다. 반칙을 하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공감대, 걸리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먼저 미안해하는 태도, 반칙한 사람이 당당해지는 상황을 공동체가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 규칙은 종이에 쓰여 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눈빛과 태도다.
우리는 종종 거리에서 누군가 규칙을 어기는 장면을 보고도 고개를 돌린다. 흡연 금지 구역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도 행인들은 그냥 지나친다. 괜히 나섰다가 나만 피곤해질 것 같아서다. 다른 사람들도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왜 나만 유난을 떠느냐는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때 작동하는 문화는 "참견하면 손해 본다"라는 학습된 경험이다. 그렇게 침묵은 합리적 선택이 되고, 반칙은 점점 일상이 된다.
투투 대주교는 이런 상황을 단호하게 정리한다. "부당함 앞에서 중립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가해자의 편에 선 것이다." 이 문장이 날카로운 이유는 위로도 없고, 빠져나갈 길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립이라는 말은 보통 스스로를 안전한 자리에 놓지만, 투투 대주교는 그 자리를 허물어 버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미 선택은 끝났다는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스스로를 "중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반칙을 지지하는 세력이 된다. 왜 그럴까? 반칙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가 배경이 되어준다. 반대로 문제를 삼는 사람은 오히려 고립된다. 주변에서 "왜 굳이 나서냐"는 눈총을 받는다. 이런 구조에서 침묵은 합리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건강한 문화에서는 구조가 다르다. 잘못을 지적하면 누군가 옆에 서 주고, 최소한 혼자는 아니라는 신호가 온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용기를 결단이 아니라 일상적 반응으로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적절한 손가락질이 중요하다. 이건 린치나 마녀사냥이 아니다. 공동체의 면역 반응이다. "그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최소한의 신호다. 반칙 앞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치지 않는 태도다. 부당함을 발견했을 때 불편함을 드러내고, 반칙 앞에서 얼굴이 굳어지고, 필요하면 말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없으면 반칙은 소음 없이 축적된다.
더 나아가 좋은 세상은 손가락질조차 필요가 없는 곳이다. 눈길 하나,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여기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회. 반칙이 이익이 아니라 체면 손상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법보다 빠르게 스스로를 조정한다.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체면이 허락하지 않아 반칙을 피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는 사회다.
에머슨이 말한 "조금 더 나은 세상"은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회. 양아치가 편해지지 않고, 침묵이 미덕처럼 포장되지 않는 사회. 적시 적소의 손가락질은 공격이 아니라 공동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세상을 크게 바꾸지 못하더라도, 오늘 내가 외면하지 않은 한 장면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머슨이 말한 성공이란, 바로 그런 순간들의 누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