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누군가는 꺾인다

by 시온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List der Vernunft, 영어로는 the cunning of reason, 우리말로 흔히 '이성의 간계(理性의 奸計)'라 옮기는 개념을 꺼내 든다. 이성은 직접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개인의 욕망과 열정, 때로는 오만과 광기까지 도구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밀어붙인다. 나폴레옹은 영광을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근대 시민사회를 유럽 전역에 심었다. 이성은 그를 이용했고, 이성은 그를 버렸다. 헤겔에게 이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헤겔의 이성은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의외로 낙관적인 설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성의 간계'는 헤겔이 쓴 맥락에서 꽤 멀리 흘러왔다. the cunning of reason에서 cunning이 풍기는 뉘앙스, 거기에 한자어 '奸計'가 얹히면서, 이 표현은 어느새 이성 자체에 대한 불신의 언어가 되었다. 이성은 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지배와 효율과 합리화의 외피를 두른 권력의 수단이라는 것.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푸코도, 그 방향을 거들었고, 20세기의 경험은 그 의심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았다. 뜻이 이동한 것은 번역자의 실수가 아니다. 역사가 인간에게 되돌려준 대가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다만 이것은 결과론에 치우친 해석이다. 헤겔이 말한 이성은 본래 비극을 통과하면서도 전진하는 힘이었지, 그 힘에 대한 불신의 근거가 아니었다.


동양에도 비슷한 결을 가진 말이 있다. 만절필동(萬折必東). 수만 번 꺾여도 강은 반드시 동쪽, 즉 바다로 흐른다. 흔히 온화한 자연의 비유로 읽히는 말이지만, '절(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단순한 굽이침만 있지는 않다. 부러짐이 있고, 뒤집힘도 있고, 수많은 것들의 파멸이 있다. 강이 바다로 가는 동안 바위에 부딪히고, 좁은 협곡을 통과하고, 때로는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솟아오른다. 만절필동은 이런 사실을 부드럽지만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읽으면 두 개념은 방향에서 겹친다. 헤겔의 이성도, 동양의 강물도, 결국 옳은 어딘가를 향해 흐르고 있다. 다만 헤겔은 그 경로에 포함된 파국과 희생을 개념의 전면으로 끌어냈고, 만절필동은 그것을 비유 안쪽에 접어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어느 쪽이 더 솔직한가를 따지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표현 모두, 진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절(折)이 따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주 지쳐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역사는 직선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느릿느릿 가다가 퇴보하고, 퇴보하는가 싶다가 갑자기 건너뛴다. 그 과정에서 the cunning of reason은 어김없이 작동하고, 만절필동의 절(折)은 계속된다. 어차피 누군가는 꺾이고, 누군가는 이성의 간계에 소모된다.


그래도, 역사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들은 있다.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여성이 투표권을 얻었고, 한때 당연했던 폭력들이 부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물론 더디고, 불균등하고, 어떤 곳에서는 지금도 퇴보 중이다. 하지만 한 세기 전과 비교하면, 세상이 인식하는 '부당함'의 범위는 분명히 넓어졌고, 그 넓어짐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먼저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그 꺾임의 몫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이 구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넘길 것인가? 아니면 적어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나와 당신이 그것을 떠맡을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문제의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미루는 것보다는, 구조를 이해하는 쪽에서 감당하는 것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비장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그 편이 조금 더 정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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