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

by 시온

대학 시절, 인상적인 경제학과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은 강의 도중 가끔 농담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카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해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태어났고, 케인즈가 서거한 해에 자신이 태어났으니, 자신은 위대한 경제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고. 그런데 그 농담은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위대함이 정말 시간의 계보처럼 이어지는 것인지, 이 질문이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사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아이작 뉴턴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해에 태어났다. 교과서는 마치 과학의 주도권이 정확히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것처럼 서술하곤 한다. 하지만 뉴턴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과는 꽤 다른 사람이 보인다.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였지만, 실제로는 연금술과 종교 연구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성서를 해석하고 신의 질서를 이해하려 했으며, 물질의 변환 가능성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비과학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뉴턴에게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더없이 진지한 탐구였을 것이다.


케인즈도 다르지 않다. 그가 경제학 강의를 들은 것은 고작 몇 달에 불과했다. 그 대신 미술과 오페라에 과도할 정도의 많은 시간을 소진했고, 투자와 정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깊숙이 발을 담갔다. 그럼에도 그는 경제를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불안과 기대가 뒤엉키는 영역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시선은 강의실보다 삶의 현장에서 더 잘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후세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뉴턴이 연금술에 빠지지 않고 과학에만 집중했다면, 케인즈가 예술과 투자를 내려놓고 경제학에 몰두했다면, 세상은 더 빨리 더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다. 위대한 성취는 오직 한 분야에 대한 극단적인 집중에서만 나온다는 믿음이다.


과연 그럴까? 사유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경로에서만 자라는 것일까? 우리가 '본업' 바깥에서 흘려보낸 시간들은 정말 낭비였을까? 오히려 그 시간들 덕분에, 기존의 지도에는 없던 세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뉴턴과 케인즈는 본업을 경시한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를 한 분야에 가두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유는 집중의 산물이라기보다, 산만함을 끝까지 견뎌낸 결과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에게 더 많은 업적을 기대하는 순간, 정작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조건을 먼저 지워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과거의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부터 한 사람의 가치를 가장 생산적인 시간만으로 재단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의 당장의 쓸모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너무 쉽게 낭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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