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모든 문제가 결국 언어 사용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세계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이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가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제멋대로 작동할 때를 가리켜 "언어가 휴가를 떠났다"고 표현했다. 언어가 휴가를 떠나면 의사소통은 겉보기에만 이루어지고, 우리는 실제로는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면서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이 진단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가짜 뉴스(fake news)라는 말이 있다. 검증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 뜻은 이미 충분히 명확하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완곡한 표현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같은 것에 다른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실체를 드러내고, 다른 하나는 실체를 감춘다는 점이다.
이 포장이 교묘한 이유는 언어의 구조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실(fact)이란 증명 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거기에 '대안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사실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격하된다.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부르면 도덕적 판단이 따라오지만, '대안적 사실'이라고 부르면 그것은 관점의 차이로 희석된다. 허위 정보를 유포한 쪽은 거짓말쟁이가 아닌 소수 의견의 옹호자가 되고, 그것을 지적하는 쪽은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언어 하나가 책임의 무게를 지우고 공격과 수비의 위치를 바꿔버린다. 베이컨이 말한 '시장의 우상'이 바로 이것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것에 이름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이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실체는 나중에 그 이름에 끌려온다.
비슷한 문제가 '극우'라는 명칭에서도 생긴다. 정치학에서 극우는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의 극단화를 의미한다. 자국 우선주의, 강한 국가, 전통 질서의 수호가 그 핵심이다. 그런데 어떤 집단을 이 틀로 부를 때, 그 집단의 실제 성격과 정치학적 정의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명칭이 실체를 가리는 것도 문제지만, 맞지 않는 명칭이 오히려 해당 집단에 이념적 외양을 입혀주는 역설도 생긴다. 어떤 집단의 성격이 정치학적 의미의 이념과 온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실체를 설명하는 대신 실체와 다른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극우'라는 명칭이 무분별하게 쓰일수록, 그 말에 담긴 여러 가지 함의가 우익과 보수 전체에 스며들 수 있다. 극단을 지향하는 일부를 가리키는 표현이 반복되다 보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보수적 가치관이나 우익적 입장 자체가 원래의 방향과 다른 것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특정 집단을 칭하다가 보수와 우익이라는 정치적 입장 전체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름이 잘못 쓰이면 엉뚱한 곳에서 피해가 발생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라면, 언어가 현실을 비추는 그림이 되지 못하고 엉뚱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언론은 언어를 선택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을 어떻게 호칭할지, 어떤 사건을 어떤 프레임으로 전달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 선택은 중립처럼 보이지만 중립이 아니다. 특정 표현을 반복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 표현은 사회적 상식이 된다. 그런 점에서 언론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한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틀을 짜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은 이 역할에 충분히 민감하지 않다. 속보와 클릭 사이에서 언어의 정확성은 자주 뒤로 밀린다. 외부에서 만들어진 표현을 검증 없이 수용하거나, 클릭 수와 주목을 끌기에 유리한 자극적인 명칭을 그대로 받아쓰는 일이 드물지 않다. 언론이 언어를 정화하는 대신 오용을 유통하는 통로가 될 때, 문제는 더 단단하게 굳는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이름을 바로잡는 것이 모든 일의 출발이라고 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논쟁들이 내용보다 명칭에서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언어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논쟁은 진전 없이 소음만 커질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바랐던 것은 거창하지 않다. 언어가 휴가에서 돌아오는 것. 말이 말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 중 일부는 스스로 풀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