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던 19세기, 갈등의 현장은 눈에 보였다. 공장 굴뚝이 있었고, 기계가 있었고, 그 앞에 선 노동자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단순한 저임금이 아니었다.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 중 임금을 초과하는 부분, 즉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고스란히 가져가는 구조 자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갈등은 가시적이었고, 그래서 저항도 가능했다. 노동자들이 공장 앞에 모여 파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굴뚝이 없다. 공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구조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넷플릭스에서 극장 흥행에 실패했던 영화가 뒤늦게 입소문을 타는 경우가 있다. 흔히 역주행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재발견일까? 넷플릭스 메인 화면 상단에 어떤 콘텐츠를 올릴지는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그 알고리즘은 넷플릭스가 설계한다. 역주행은 관객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플랫폼의 선택이 먼저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유통이 생산을 통제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제작사는 이제 영화를 만들 때 극장 관객보다 플랫폼의 입맛을 먼저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고리즘이 좋아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창작의 기준이 바뀌었다.
경제학에는 지대라는 개념이 있다. 원래는 토지에서 나온 말이다. 땅을 가진 지주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도 소작농에게 소작료를 받았다. 비옥한 땅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득이 생겼다. 이것을 지대라 불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고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지대 추구(Rent-seeking)라 불렀다.
구글, 아마존, 배달의 민족, 야놀자.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디지털 길목이다. 동네 식당 주인이 손님과 만나려면, 펜션 주인이 여행자와 연결되려면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플랫폼은 통행료 명목의 수수료를 받고 또한 데이터도 가져간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요리사이고, 숙소를 운영하는 것은 사장이지만, 그 사이에 앉아서 가장 안정적으로 수익을 챙기는 것은 플랫폼이다.
마르크스 시대에 경제의 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자본가였다면, 지금은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다. 숫자에 밝고 코드를 다루는, 이른바 디제라티(Digerati)라 불리는 기술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설계한 알고리즘은 누가 노출되고 누가 묻힐지를 결정한다. 사업의 논리가 수학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 시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잉여가치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달앱을 쓸 때마다 플랫폼이 얼마를 가져가는지, 내 검색 기록과 클릭 데이터가 어떻게 환산되어 누구의 이익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수수료율이 공개되어 있어도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은 영업비밀이다. 이 불투명성은 단순히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보여야 문제라고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야 연대가 생긴다. 보이지 않으면 저항도 없고, 저항이 없으면 구조는 그대로 굳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배달앱이 시장을 장악한 뒤 수수료를 단계적으로 올려도 개개의 입점 식당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처음 입점할 때와 조건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협상력이 없다. 게다가 아마존은 입점 판매자들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해 잘 팔리는 상품을 자체 브랜드로 만들어 직접 경쟁에 나선다. 길목을 내준 대가로 자신의 정보까지 빼앗기는 셈이다. 구글은 검색 알고리즘을 수시로 바꾸는데, 그때마다 중소 콘텐츠 사업자나 언론사의 트래픽이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하루아침에 반 토막 난다. 규칙을 정하는 쪽은 대체로 플랫폼이고, 따라야 하는 쪽은 대체로 생산자다.
그리고 조금 더 조용하게, 공동체가 허약해진다. 플랫폼은 연결을 팔지만 실은 모든 연결이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설계한다. 단골손님이 식당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 필요가 없어졌고, 여행자는 숙소 주인과 굳이 직접 이야기할 이유가 없어졌다. 과다한 수수료 등으로 버티지 못한 동네 식당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 그 자리에서 이어지던 관계도 함께 사라진다. 거래는 편리해졌지만, 공동체는 얇아졌다.
알고리즘이 중간에 끼어들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가? 그 연결의 방식이 공동체를 만들었고, 공동체가 사람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묻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