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어느 회사 광고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 당시 꽤 화제가 됐던 문구다.
요즘 들어 자꾸 떠오르는데, 이유는 이 문장이 단순한 광고 문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와 차별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윤리적 성격을 지닌다. 시장경제는 결국 차이를 인정하는 시스템이다. A가 B보다 일을 잘하면 더 많이 받는다. 이 제품이 저 제품보다 품질이 좋으면 더 비싸다. 능력, 노력, 선택의 결과가 다르다면 보상도 달라야 한다는 것. 이게 정보고, 그 정보로 자원이 움직인다. 차이를 무시하면 시장이 망가진다.
그런데 차별은 다르다. 같은 성과를 냈는데 누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왜곡이다. 차이는 성과에서 나오고, 차별은 관계에서 나온다. 효율이 같음에도 "누구 편이냐"로 줄을 세우는 순간, 그건 이미 시장경제가 아니라 패거리의 논리다.
더 골치 아픈 건 이 둘이 섞일 때다. 차별을 차이인 척 포장하는 순간, 모든 게 꼬인다. "저 사람은 능력이 부족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줄을 잘못 섰을 뿐이라면, 탈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붙은 사람은 자기가 정말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시스템은 썩어가는데 아무도 모른다.
요즘 우리 사회의 분노가 불평등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차별이 차이인 척하는 구조 때문이다. 능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결과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걸 능력 탓으로 돌리니까 화가 나는 거다. 불평등이 설명되지 않을 때 사회는 분열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차이를 인정하는 시스템이 맞지만, 그 차이가 고착되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분명한 차이에서 출발한다. 더 나은 기술, 더 빠른 판단, 더 많은 위험 감수.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서 그 차이가 축적되어 자산이 되면, 자산은 다시 기회를 낳는다. 좋은 학교, 좋은 학원, 해외 경험, 인턴 기회, 심지어 실패할 자유까지. 교육, 네트워크, 정보 접근성은 세대를 이어가며 축적된다. 이 지점에서 차이는 점점 개인의 선택과 무관해지고, 출발선 자체가 달라진다.
시장은 차이를 확대하는 데 탁월하지만, 차이를 초기화하는 능력은 거의 없다.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남고, 성공은 구조로 전환된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허해진다. 이미 축적된 차이가 다음 경쟁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실력보다 초기 위치가 중요해지는 순간, 차이는 운명이 된다. ‘아빠 찬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어."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수 있다.
이게 고착되면 사회가 갈라진다. 아래쪽에서는 "아무리 해도 안 되네"라는 체념이 쌓이고, 위쪽에서는 "우리는 능력으로 왔어"라는 자기정당화가 굳어진다. 이 둘이 만나면 대화가 안 된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와 차별을 방치하는 사회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긴장 속에서도 역동성을 유지하지만, 후자는 조용히 분노를 축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해법이 단순한 평등주의일 수는 없다.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자는 주장은 시장을 무력화시킨다. 그래서 복지나 누진세나 공교육 같은 게 필요한 거라고 본다. 도덕적 동정이 아니다. 차이를 유지하되 고착을 완화하는 장치다. 시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스스로 파괴되지 않도록 지탱하는 보정 장치다.
그 광고 카피가 정확했던 이유는 이거다. 차이와 차별은 전혀 다른 것이고, 둘을 혼동하는 순간 모든 게 틀어진다는 것.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작동한다. 하지만 차별은 막아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공정하다. 그리고 차이가 고착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살아 있다.
시장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차이를 얼마나 키우느냐가 아니라, 차이가 운명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얼마나 성실하게 개입하느냐에 달려 있다. 차이를 인정하는 용기만큼, 차별을 의심하는 태도 역시 시장을 지키는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