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以夷制夷

by 시온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많은 사람들은 "거대 외국 자금이 갑자기 빠져나갔다"는 설명을 들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순간이었다. 영국 경제학자 수전 스트레인지는 이런 현상을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투기적 자본 활동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본주의 경제, 자본이 기업을 키우거나 일자리를 만드는 것보다 주식이나 환율 같은 금융자산의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이용해 차익을 남기는 데 집중하면서 금융시장이 거대한 도박장처럼 작동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게 왜 문제일까? 우선 자본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돈이 생산성 높은 곳으로 흘러가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카지노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회사의 미래 가치보다 내일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에만 반응한다. 돈벌이는 되지만 실질적인 성장과는 무관한 게임이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익과 위험이 따로 논다는 점이다. 돈을 벌 땐 소수가 챙기지만, 손해가 나면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고 결국 국가와 시민이 그 비용을 떠안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복잡한 금융상품과 알고리즘이 얽히면서 누가 무엇을 결정했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책임질 사람이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디지털 기술은 카지노 자본주의를 만든 원인은 아니지만, 그것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역할을 했다. 금융은 원래 물건을 만들거나 쌓아두는 산업이 아니었다. 공장도 기계도 필요 없이 숫자와 계약으로 움직이는 세계였기에 디지털화하기가 가장 쉬웠다.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금융은 순수한 데이터 처리 작업이 되었고, 실제 경제와의 연결은 점점 약해졌다.


디지털 기술은 금융 거래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웠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파생상품이나 구조화 금융상품 같은 것들은 디지털 시스템 없이는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이런 복잡한 구조가 위험을 줄이기보다 여기저기 흩어놓아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아무도 위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카지노 자본주의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금융위기가 가끔 터지는 큰 사건이었다면, 지금은 시장이 24시간 열려 있고 자본이 쉼 없이 이동하면서 불안정한 상태가 평소 모습이 되어버렸다. 카지노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금융의 기본 풍경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카지노 자본주의를 키운 디지털 기술로 오히려 그 문제를 완화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장 경제의 기본 원칙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이 자유롭게 형성되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게 아니라, 책임과 투명성을 되찾는 방향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능성은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블록체인 같은 기술은 모든 금융 거래를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나중에 추적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게 왜 중요할까? 도덕적으로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누가 어떤 구조로 위험을 만들었는지 기록이 남으면,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워진다.


두 번째는 금융과 실물경제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금융을 실제 경제에서 떼어냈다면, 다시 붙이는 데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융상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단순히 수익률만 보는 게 아니라 그 회사가 얼마나 고용을 창출하는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실질적인 지표도 함께 고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자주 듣는 ESG를 단순한 홍보용 구호가 아니라 계약 조건으로 실제로 넣는 방법도 있다. 이건 시장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다고 볼 것인가의 기준을 넓히는 일이다.


세 번째는 위험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진짜 무서운 점은 위험이 크다는 게 아니라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복잡하게 얽힌 위험 구조를 시뮬레이션하고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다. 위험이 명확히 보이면 투자자들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금융회사들은 평판을 걱정하게 되며, 정부는 사고 난 뒤 수습하는 대신 미리 규칙을 세울 수 있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너무 잘 작동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설명할 수 없는 영역까지 뻗어나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은 그 확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한계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관건은 기술이 아니다. 어떤 자본주의를 正常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시장 규칙 안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의 문제다. 이 질문에 우리가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디지털 기술은 카지노의 조명이 아니라 시장 질서의 토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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