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이런 사람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지인의 직장 선배 이야기다. 스펙의 범상함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만 명이 다니는 대기업에서 공인 영어시험 1등, 사내 바둑 실력 1등. 해외 유학 한 번 없이 이룬 결과다. 외자 유치 협상에 회사 대표로 나설 만큼 영어 실력 등이 뛰어났고, 결국 고위 임원 자리까지 올랐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다.
그런데 그 과정이 좀 이상하다. 보통 임원까지 오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지런함이란, 골프 약속에 빠지지 않는 것, 윗사람이 좋아하는 자리에 얼굴을 내미는 것, 경쟁자의 약점을 만들어서라도 적절히 흘리는 것, 줄을 잘 서는 것 등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 생활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선배는 그 모든 것에 지독히도 게을렀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에는 영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관심이 있었던 건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부하 직원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대부분의 관리자는 재빠르게 꼬리를 자른다. 그래야 본인이 산다. 그런데 이 선배는 그 잘못을 본인이 뒤집어썼다. 덕분에 요직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적이 있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후배가 연락을 해오면, 선약이 있어도 그냥 거절하지 않았다. 먼저 잡힌 약속을 마치고, 오후 10시가 넘어서라도 후배를 만났다. 고위 임원이 밤 10시 이후에 후배의 사연을 들어주러 나간다는 것은 꽤 진귀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CEO가 인사 담당 임원을 불러 이 선배의 사표를 받아오라고 했다. 인사철도 아니었고 임기 중이었다. 표면적인 명분은 ‘근무 태도 불량’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CEO가 싫어하는 지역 출신 인사들을 이 선배가 요직에 기용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볼 때 지역이나 파벌 같은 기준이 애초에 없었던 분이니, 본인 입장에서는 그냥 능력 있는 사람을 쓴 것뿐이었다. 인사 담당 임원이 법적 문제를 거론하며 막아보려 했지만 CEO는 완강했다.
인사 담당 임원은 이 선배를 존경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선배를 찾아가 사표를 요구했다. 선배는 격앙됐다. 당연한 반응이다. 부당한 일이었으니까. 법적으로 싸우겠다고 했다. 명분도 충분했다. 그런데 인사 담당 임원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형이 버티면 후배들이 힘들어져." 그러자 선배는 바로 사표를 썼다고 한다.
그날 밤, 둘은 새벽 4시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별말이 없었을 수도 있다. 말이 필요 없는 밤이었을 테니.
퇴직 후 이 선배는 어떻게 지낼까? 그 정도 능력이면 헤드헌터들이 줄을 설 텐데, 인맥을 풀어 그럴듯한 자리를 찾아다닐 법도 한데 — 조용히 취미 생활을 하며 지낸다고 한다. 후배들이 연락하면 반갑게 만나주고, 밥과 술은 선배가 산다. 위로를 받는 쪽이 아니라, 여전히 위로를 주는 쪽에 서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선배가 직장 생활을 가장 못한 사람이다. 줄도 안 서고, 아부도 못하고, 뒷담화도 안 하고, 꼬리도 안 잘랐다. CEO 눈치도 못 읽고, 결국 잘렸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 남을까?
아마도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은연중에 잃어버리는 것들을 이 선배는 끝까지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지역으로 나누지 않는 것, 부하 직원 편에 서는 것, 자기 자리보다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것. 말로는 다들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대가를 치러야 할 때는 슬그머니 내려놓게 되는 것들.
이 선배는 그냥 그렇게 살았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그 사람의 기본값이었던 것 같다.가장 게으른 사람이 가장 오래 기억된다.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