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홍수, 사유의 가뭄

by 시온

트럼프, 두테르테, 보우소나루, 에르도안, 푸틴, 그리고 브렉시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언뜻 보면 각기 다른 대륙, 다른 이념,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 듯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흐른다. 합리적 중도가 무너지고, 감정의 정치가 권력을 장악했다. 세계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현상이 아니다. 인류가 '생각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든 징후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예리하게 지적했다. "디지털 환경은 우리의 인지 부하를 초과시킨다. 우리는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해지며, 스스로 혹사당하는 존재가 된다." 한때 인간은 책을 읽고, 생각을 곱씹으며, 장기 기억을 통해 사고의 깊이를 키워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한 문장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알림이 울리고, 영상이 자동 재생되며, 댓글창이 우리를 부른다. 사유는 잘려 나가고, 생각의 여백은 사라졌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 동시에 가장 얕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은 늘었으나 지성은 줄었다. 마치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은 떨어진 세대처럼. 우리는 '지식의 소비자'는 되었지만, '사유의 주체'로서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피로는 정치와 경제 구조의 균열과 맞물렸다. 세계화는 더 이상 모두의 번영을 약속하지 않았고, 불평등의 골은 깊어졌다. 중산층은 무너졌고, 기득권에 대한 염증은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지쳤다. 복잡한 보고서, 전문가의 설명, 데이터와 그래프, 이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의 단순한 해답'을 원했다. 그 해답이 바로 '강한 리더'였다. 두테르테는 "범죄자를 쏴 죽이겠다."고 말했고, 필리핀 민중은 환호했다. 보우소나루는 아마존을 팔아서라도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고, 브라질은 그를 선택했다. 트럼프는 벽을 쌓겠다고 했고, 미국은 두 번이나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브렉시트는 ‘통제권을 되찾자’는 단순한 구호로 복잡한 유럽 통합의 역사를 무너뜨렸다. 이들은 모두 감정의 정치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먹혔다. 왜? 사람들이 생각을 멈췄기 때문이다.


공통된 패턴은 명확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보다 '내가 믿고 싶은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진실 피로(Fact Fatigue)가 만연한 시대, 사실과 근거는 힘을 잃었다. 대신 분노와 확신이 정치적 힘이 되었다. 디지털 알고리즘은 이러한 감정을 증폭시킨다. 공론의 장은 더 이상 '정보 교환의 장'이 아니라 '감정 증폭의 장'으로 변했다.


소셜미디어는 분노와 조롱이 순환하는 폐쇄 생태계가 되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게시물만 보고, 나와 다른 목소리는 차단한다. 공론장은 파편화되고, 사회는 분열된다. 허위 정보는 빠르게 퍼지지만, 팩트 체크는 느리다. 인간의 뇌는 논리보다 감정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단순해지고, 단순한 사회는 쉽게 극단으로 흐른다.


17세기, 데카르트는 혼돈의 시대에 한 가지 확실성을 찾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선언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었다. 종교와 정치, 권위와 신념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사유의 주체'로 세우는 행위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명제를 뒤집어 물어야 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는가?"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뉴스, 트렌드, 댓글 대부분은 이미 알고리즘이 선별한 타인의 생각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정보의 소비자로 존재한다. 생각을 멈춘 인간은 스스로 존재를 잃는다.


극단으로 치닫는 세상은 정치적 현상이기 전에 철학적 징후다. 트럼프의 장벽, 두테르테의 총, 보우소나루의 개발, 푸틴의 전쟁, 브렉시트의 고립, 이 모든 것은 '사유의 빈자리'가 만든 시대적 현상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생각의 깊이이다. 깊이 있는 사고는 속도가 아니라 '멈춤'에서 시작된다. 잠시 멈추고, 의심하고, 성찰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다시 주체가 된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 확실성을 찾았듯, 우리 또한 혼돈의 시대를 통과하려면 사유의 회복이 필요하다. 한 권의 명저를 여러 번 읽는 일, 긴 대화를 나누는 일, 나와 다른 의견을 끝까지 듣는 일—이 모든 것이 회복의 시작이 된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을 사랑할 줄 모르는 선동가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확신에 도취되어, 타인의 고통을 정치적 修辭로 소비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구호로 왜곡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이 남아 있는 한, 세상은 아직 회복될 수 있다. 지식의 시대를 넘어, 다시 지성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우리는 지금, '나는 생각한다'는 오래된 선언을 다시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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