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입장권을 발행하는가?

by 시온

어릴 때 동네 골목마다 형들이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아이가 축구 한 판 끼려면 먼저 형들한테 점수를 따야 했다. 실력은 나중 일이었다. 일단 형들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 골목 공터가 세상과 닮아 있었다는 것을. 어떤 세계든 겉에서 보면 실력이 기준인 것 같지만, 들어가 보면 사람이 먼저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세계에는 늘 문이 있고, 그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다.


관문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기준이 없으면 그 세계는 흐물흐물해진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처럼 전 세계 연주자들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는 자리라면, 결과가 다소 아쉽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적어도 무대에 오르는 순간만큼은 이름이 아니라 연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신춘문예도 본래 취지는 그랬다. 이름 없는 원고가 심사대에 오르고, 작품이 먼저 읽혔다. 완벽한 제도는 아니었어도 최소한의 공정한 조건은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몇 사람의 추천, 몇 사람의 평가, 몇 사람의 눈길이 어떤 사람의 앞날을 통째로 결정하는 구조가 되면, 문은 슬그머니 다른 용도로 바뀐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작품보다 사람을 먼저 얻어야 했다. 실력보다 계보가 먼저였다. 어느 선배 작가의 추천을 받았는지, 어느 문예지 라인인지가 신인 작가에 대한 첫 소개였다. 한국 문단이 오랫동안 등단에 집착했던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발행된 입장권은 능력의 확인서가 아니라 소속의 증표로 변질된다. 작가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단의 새 회원이 영입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오래 굳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한때 문학계의 거장으로 떠받들렸던 인물의 성추행이 뒤늦게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더 서늘했던 것은 충격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예술 교육 현장에서 불거진 입시 비리도 마찬가지다. 비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침묵이 쌓이고, 그 침묵이 관행이 되고, 관행이 문화가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거장의 그늘은 작품이 아니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세월이 만든 것이었다. 그 세계가 얼마나 깊었으면 이런 시가 나왔을까? 최영미 시인은 「등단 소감」이라는 시에서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고 썼다.


이런 풍경이 예술계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무게가 있다. 새로 이사한 이웃에게 외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약하게 구는 텃세, 술을 못 해도 억지로 마시게 하는 신고식, 선배 간호사가 후배를 괴롭히는 ‘태움’. 현장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구조는 거의 같다. 진입 통로가 좁고, 위계가 강하며, 평가 권한이 몇 사람에게만 쏠려 있다. 이 조건이 갖춰지면 입장권은 어김없이 편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결국 입장권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문이 실력을 보는 문인지, 사람을 보는 문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을 정기적으로 묻지 않으면, 문은 슬그머니 용도를 바꾼다. 들어오는 사람을 고르는 문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문으로. 그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을 우리는 대부분 놓친다. 그래서 가끔 이 질문을 혼자 되뇐다. 지금 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왜 자기가 그 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리고 그는 그 입장권을, 정말 발행할 자격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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