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과 아인슈타인은 오늘날 나란히 인류 최고의 과학자로 불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물리학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다른 분야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치였다면? 종교였다면? 아마 틀린 것으로 판명된 쪽은 이단으로 몰리거나 승자 측 추종자들에게 평생 공격받았을 것이다. 과학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차이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인슈타인이 한 일을 정확히 말하자면, 뉴턴의 물리학을 더 넓은 세계 안에 재배치한 것이다. 일상적인 속도와 약한 중력의 범위 안에서 뉴턴의 방정식은 여전히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오늘도 로켓을 쏘고 다리를 설계할 때 우리는 뉴턴의 방정식을 쓴다. 아인슈타인은 그 경계 밖, 빛의 속도에 가까운 극단적인 세계에서 뉴턴이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설명했다. 그것은 폐기가 아니라 확장이었다. 과학에서 말하는 반증의 성격이 바로 이렇다. 틀렸다는 선고가 아니라, 유효 범위의 재정의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자신도 같은 처지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우주 팽창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주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방정식에 임의의 수치를 억지로 끼워 넣었고, 나중에 스스로 그것을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불렀다. 자신의 이론을 자양분으로 탄생한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끝까지 완강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우주는 확률이 아니라 엄밀한 인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 그러나 그 믿음은 끝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그 반대가 헛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던진 날카로운 비판들은 후대 물리학자들을 자극했고, 그 자극이 양자역학을 더 정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실수가 실패로 끝나지 않은 것이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틀린 질문이 옳은 답을 향한 길을 열기도 한다.
과학이 이토록 건강한 자기 수정의 역사를 쌓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역사가 과학을 현대인에게 진리를 판별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준으로 만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대접은 충분히 받을 만하다. 오늘날 어떤 주장이든 '과학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사람들은 그 내용을 굳이 따져보려 하지 않는다. 권위 있는 해외 연구기관의 실험 결과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검증하며 살아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전문가 집단이 검증한 결과를 신뢰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칼 포퍼의 통찰이 깔려 있다. 과학 이론은 절대 최종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오직 아직 반증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반증은 패배가 아니라 과학의 호흡 그 자체다. 반증될 수 없는 주장은 과학이 아니다. 뉴턴이 반증되었다는 것은 그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충분히 대담하지만 구체적인 예측을 했다는 증거다. 반증당할 만큼 진지하게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는 뜻이다.
다른 분야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정치에서 예측이 틀리면 책임이 따른다. 사업에서 전략이 실패하면 퇴출된다. 이념에서 핵심 명제가 흔들리면 분열이 온다. 이 세계들은 구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과거의 권위자를 틀린 사람으로 만들어야 현재의 권위자가 설 자리가 생긴다. 과학은 다르다. 새로운 이론은 이전 이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하며 넓혀간다. 그래서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아인슈타인과 논쟁을 벌였던 보어도 같은 교과서 안에 나란히 살아 있다.
뉴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 거인 중 하나가 훗날 뉴턴 자신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어깨 위에 올라섰고, 또 다른 어깨가 되었다. 그 어깨를 딛고 올라선 사람들이 양자역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반대를 딛고 올라서면서도, 그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의 반대가 없었다면 자신들의 이론이 이만큼 단단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누가 최종적으로 옳은가를 가리는 경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덜 틀릴 수 있는가를 함께 추구하는 과정이다. 틀림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이고, 그 용기가 다음 세대의 발판이 된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틀린 사람도 존경 받을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과학이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지식 활동 중 가장 건강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