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둘이 만나는 날이 왔다. 12월 23일. 이틀 뒤 크리스마스인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유원이 곧 공항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기에 제이콥은 깜짝 이벤트로 공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저 캐나다에 곧 도착한다는 사실이 설렐 뿐이었다. 제이콥은 일찍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장에서 유원의 모습을 계속 찾고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 유원이 얼핏 보였다. 유원이 키가 큰 편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원아! Surprise!" 제이콥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전혀 예상도 못했는데!" 유원이 놀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걸로 당 충전해!" 제이콥은 따뜻한 메이플 라뗴를 건넸다.
"우와! 당 충전 제대로 되겠는데!"감동받은 나머지 유원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됐다.
메이플 라떼는 진한 커피와 메이플 시럽이 어우러져 달콤하고 따뜻했다. 한 모금 마시니 저절로 온몸에 온기가 가득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 비행시간도 꽤 걸렸을 텐데." 제이콥이 말헀다.
"나는 멀미도 잘 안 하는 편이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영화 조금 보다가 계속 자서 괜찮아!"
"그래도 피곤하긴 할 거니까 숙소에 짐 두고 잠깐 쉬자."
"그래! 내가 홈스테이 신청해 둬서 거기로 가면 되겠다!"
"주소 보여주면 내가 우버 부를게."
제이콥은 유원이 알려준 주소를 쓰다가 멈칫했다. 왠지 무척 낯익은 주소였다. '잠깐... 이건 우리 집 주소잖아!' 제이콥이 속으로 외쳤다. 제이콥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왜 이 사실을 안 알려주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가 최근에 훈련하느라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이 적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이콥은 자신의 집에 유원이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지만 신났다. 유원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유원아 그거 알아? 이 주소 우리 집이야!" 제이콥은 우버에 타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헉.. 진짜? 생각도 못했다!" 유원은 너무 놀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부담 가지지 마. 다들 잘 대해주실 거야!"
"좀 당황스럽긴 한데, 그래도 너 자주 볼 수 있으니까 좋긴 하다."
유원과 제이콥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제이콥은 유원에게 먼저 초인종을 누를 것을 제안했다. 유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라 약간 경직된 상태였지만, 애써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얼마 뒤, 문이 열리더니 제이콥의 어머니가 밝게 웃으며 반겨주셨다. 그리고 제이콥의 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면서 환영 인사를 건네셨다. 유원은 그래도 인상이 무척 좋으신 두 분이 반겨주시니, 긴장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후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문틈 사이로 제이콥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아빠, 엄마! 유원이 온다는 얘기 왜 안 해주셨어요? 알았으면 저도 집 정리하는 거 도왔을 텐데요." 제이콥이 물었다.
"네 훈련에 방해받을까 봐. 말하진 않았다. 근데.. 잠깐! 너희 둘이 아는 사이니?" 제이콥의 어머니가 뭔가 감이 잡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셨다.
"그게... 실은 저희 둘이 펜팔 친구로 연락하다가 사귀게 되었어요!" 제이콥이 솔직하게 연인이 된 사실을 털어놓았다. 포커페이스 뒤에는 사실 두 분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도 되었다.
"우리 아들한테 드디어 여자친구도 생겼구나! 그럴 수 있는 나이지. 축하한다. 그래도 같이 지내는데 어색하지는 않겠구나.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렴." 제이콥의 어머니는 유원 쪽을 보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유원은 안도감에 한껏 경직된 표정이 한층 편안해졌다. 제이콥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둘은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캐나다 가정식을 든든하게 먹었다. 이후, 제이콥이 집구석구석을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유원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헷갈리지 않고 숙지할 수 있었다. 둘은 바깥이 꽤 어두워지고 크리스마스 조명들로 빛날 무렵, 따뜻하게 털모자와 장갑, 그리고 패딩을 챙겨 입고 토론토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방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눈도 조금씩 내렸고 겨울 특유의 포근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귀여운 소품들과 선물 종류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시간이 늦어지자 제이콥과 유원은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이불을 걷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만큼, 둘은 들떠 있었다. 바로 둘이 처음으로 함께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이브였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둘이 스케이트를 타러 토론토 시청 앞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유원아, 너 스케이트 잘 타?"
"음... 전혀. 타본 적이 많이 없을뿐더러 어릴 때 인라인 스케이트 타본 경험이 전부야. 너는?"
"나는 아이스하키도 하니까 스케이트를 많이 타봤어. 내가 너 도와줄게. 나만 믿어!" 제이콥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렇겠네. 너만 믿는다!"
유원은 스케이트장에 들어가자마자 약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제이콥은 유원의 손을 잡고 천천히 리드해 줬다. 유원은 그날따라 제이콥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마음껏 스케이트를 타고나서 둘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도심 거리를 지나가다 아늑해 보이는 카페에 브런치를 먹으러 들어갔다. 마침 유원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곧 먹음직스러운 팬케이크와 소시지 계란 프라이 등이 나오면서 입에 침이 고이게 했다.
"맛있겠다!" 유원이 나이프로 팬케이크를 자른 뒤, 한 조각을 집으며 흥얼거렸다.
"그러게! 음~브런치는 매일 먹어도 맛있을 거 같아!"
"맞아 맞아." 유원은 대답하면서 주머니에서 작은 민트색 상자를 꺼내 제이콥에게 건넸다.
"이거 뭐야! 감동이야!" 제이콥은 상자를 열더니 유원이 직접 만든 걸로 보이는 비즈 팔찌를 꺼냈다.
"이거 너 경기 때마다 끼고 다니라고 만든 응원 팔찌야!"
"너무 귀엽다! 내가 이거는 계속 끼고 생활한다." 제이콥은 팔찌를 차보고 마주 앉은 유원의 손목에 걸려 있는
같은 패턴의 비즈 팔찌를 바라보며 가리켰다.
"맞아. 커플템이야!" 유원은 빙그레 웃었다.
"오오 진짜? 너 손재주 좋구나! 의미 있고 좋다." 제이콥은 활짝 웃었다.
둘은 그날 저녁도 집에 가서 가족들과 다 같이 둘러앉아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다음날이 크리스마스인지라 모두가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다들 웃음이 가득했고 유원도 어느새 이 분위기에 적응이 되었다.
25일 당일, 둘은 같이 아침을 만들었다. 제이콥은 스크램블 에그와 소시지를 준비했고 유원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었다. 같이 만들어서 그런지 무척 맛있는 식사였다. 제이콥은 유원에게 식사를 마친 뒤, 선물을 건넸다. 분홍색의 네모난 상자 안에 뭔가가 들어있었다.
"뭐지? 기대되는 걸?" 유원은 신나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다. 따뜻하고 폭닥한 아이보리색 스웨터가 있었다. 붉은색 하트 모양 안에 "For you"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도 우리 커플템이야!" 제이콥은 자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를 가리켰다.
"고마워! 나도 입어야겠다!" 유원은 재빨리 스웨터를 입고 나왔다. 유원에게 맞춰서 제작된 듯이 거짓말처럼 크기가 딱 맞았고 무척 따뜻했다.
유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여기가 제이콥의 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제이콥에게 안겼다. 제이콥은 수줍게 웃으면서 유원을 안아주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제이콥의 아버지는 카메라를 가지고 온 뒤, 둘의 모습을 찍었고
둘이 트리 앞에 서보라고 하신 뒤, 행복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셨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듣고 영화도 보면서 유원과 제이콥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소파에 앉아 서로에게 기대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의 모습이었다.
"우리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제이콥이 말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지 할 수 있지! 뜻밖의 우연이 '우리'라는 행운을 선물해 주었으니!" 유원이 신나서 대답했다.
유원과 제이콥은 그동안 떨어져 생활했던 하루하루가 무색할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도 둘이 훈련과 학업, 그리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떨어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가 지닌 팔찌나 스웨터처럼 멀리 있어도 함께 하며, 카메라로 남긴 크리스마스 사진처럼 빛나는 추억들을 쌓아나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둘은 서로를 향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뜻밖의 행운은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운명의 시작일지는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우리 모두 우연한 기회가 왔을 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준비해 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